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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테마무비]당신이 잠든 사이에…

입력 | 2000-12-31 16:25:00


오늘밤 잠자리에 들고 내일 아침 일어났을 때 똑같은 하루가 시작되라는 법은 없다("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거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본질적으로 똑같은 '나'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같다고도 할 수 없다.

사실 이러한 '일상의 존재론'은 몇 줄의 글로 풀어내기에 너무나 거대한 철학적 테마다. 같은 영화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끊임없이 전진하며 반복되는 24시간은, 그 안에 거주하는 주체인 '인간'이 변하기 전에는 무의미할 뿐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자고 일어났을 때 가장 황당했을 법한 사나이는 의 니콜러스 케이지다. 스크루지 이야기와 프랭크 카프라의 을 슬쩍 빌려온 은, 의 '인생 극장'처럼 삶의 두 가지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크리스마스에도 직원회의를 소집하는 냉혈한 니콜러스 케이지. 사랑이나 가족의 소중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에 깨어보니 그는 두 아이의 아버지며 한 여자(옛 애인)의 남편이 되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처음에는 도저히 적응하지 못했던 그는 가족 구성원 역할에 점점 익숙해지고, 결국 가족 없이는 도저히 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꿈이었고 '가족의 가치'에 완전히 감화된 그는 그 꿈속으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다.

자고 일어났더니 너무나 많은 것이 바뀌어 있다? (2001년 1월13일 개봉)의 멜 깁슨도 예외는 아니다. 전기충격을 받고 쓰러진 다음날 아침, 그는 초능력자가 되어 있다. 여자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들을 수 있게 된 멜 깁슨. 하지만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다. 특히 그처럼 남성 중심적 사고에 길들여진 '마초'에게는. 여기저기서 재잘대는 여자들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듣게 된 멜 깁슨은 자신에 대한 악담을 접하면서, 처음에는 무척이나 당황했지만 나중에는 그녀들을 이해한다.

가 너무 허무맹랑하다고? 그렇다면 황당함의 진수 이 있다. 조슈아는 키가 작은 탓에 놀이공원 청룡열차도 못타는 꼬맹이다. 아이의 소원은 빨리 어른이 되는 것. 누구나 자라면 어른이 되겠지만 조슈아의 경우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고, 그래서 톰 행크스는 12살의 지능에 어른의 몸을 가진 이상한 존재가 된다. 몸은 어른이지만 장난감 더미에 파묻혀 허우적대는 그 녀석은 결국 다시 아이의 몸으로 돌아가고 '어른 조슈아'를 사랑했던 여자는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아이의 간절한 소원은 자신이 아닌 타인마저 변화시키는가 보다. 에서 생일을 맞은 아이는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변호사 아버지가 정직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생일 케이크 촛불을 끄며 기도한다. 그날도 아빠는 생일 파티에 온다고 하곤 안 왔다. 거짓말쟁이 짐 캐리는 졸지에 '참말쟁이'가 되었고 맘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는다. 위에서 얘기한 영화들이 모두 이전 상태로 돌아온다면, 의 특징은 변화가 그대로 지속된다는 점. 만약에 짐 캐리가 다시 거짓말쟁이로 되돌아간다면 그 아이의 가슴엔 큰 멍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룻밤 자고 나니…' 영화 중 가장 애절하면서도 인상적이었던 영화는 (Somewhere in Time)이다. 왕년의 '슈퍼맨' 크리스토퍼 리브가 주인공인 이 영화는 시간을 뛰어넘는 사랑의 판타지와 그 불가능성을 동시에 말한다. 이상한 사랑의 인연을 감지한 그는 어느 호텔 방에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시도한다. 과거의 옷을 입고 과거의 물건을 갖다놓고 과거를 생각하고….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얘기겠지만, 침대에 누워 있다가 눈을 뜬 그는 어느새 과거로 왔고, 어느 여인과 사랑을 나누지만 사소한 실수 때문에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과거의 사랑을 가슴에 품은 채 하루하루 시들어가는 크리스토퍼 리브…. 그 '깊은 슬픔'은 헤아릴 길이 없다.

김형석(영화칼럼리스트)woody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