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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출판통신/도쿄에서]스탈린이 언어학을 했다고?

입력 | 2000-09-08 19:02:00


저자 다나카 가츠히코는 언어와 민족 국가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독창적인 사회언어학의 학풍을 정립한, 일본을 대표하는 사회언어학자이다. ‘말과 국가’, ‘언어에서 본 민족과 국가’와 같은 그의 저작은, 이제 조금이라도 사회언어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책들은 언어와 민족 문제에 관심을 둔 이들의 지적 갈증을 풀어 주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언어와 민족 문제에 관한 문제 의식을 심어 주는 저작들이기도 하다.

‘스탈린 언어학’이라는 말은, 우리들에게 그저 낯설고 서먹서먹하기만 한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스탈린을, 히틀러와 어깨를 겨루는 무시무시한 냉혈한으로만 떠올린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스탈린은 한때 거의 ‘하느님’과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실, 스탈린은 정치가로서만이 아니라 지식의 각 분야에 걸쳐 일가견을 가진, 사상가로서의 풍모도 겸비하고 있었다.

1920년대의 소련에서는 구조주의 이론의 선구적 역할을 했던 언어론을 비롯해, 다채로운 언어 이론들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스탈린 체제하에 들어가면서 니콜라이 마르의 이론만이 언어학계를 독주하게 되었고, 이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사람들은 즉각 이단자로 낙인찍혀 숙청당하고 말았다. 마르는, 언어는 다른 사회 요소와 마찬가지로 상부구조에 속하며, 그 본질은 계급관계가 근본적으로 규정한다고 보았다. 또한, 마르가 비교언어학을 부정하고 독특한 ‘언어 교배’ 이론을 세운 것도 유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독보적인 니콜라이 마르의 언어 이론을 한꺼번에 뒤엎은 것은, 다름 아닌 1950년에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에 발표된 스탈린의 언어학 논문이었다. 이 논문에서 스탈린은, 마르의 이론을 완전히 부정하고, 언어는 상부구조에 속하지 않으며 계급횡단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라고 규정했다. 이것은 스탈린이 산파 역할을 했고 키워 왔던 ‘소비에트 과학’이 바로 그 스탈린 자신의 손에 의해 깡그리 부서지고 말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도대체 이같은 일이 왜 일어났으며, 스탈린의 언어학 논문이 갖는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를, 사상적 맥락 및 소련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지으면서 파헤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구사되는 저자 특유의 해박한 지식, 그리고 이 책 전체에 흐르고 있는 리듬감과 명쾌한 전개 방식은, 마치 뛰어난 탐정소설을 읽는 것 같은 흥분마저 불러 일으킨다.

지금까지 ‘소비에트 과학’은 단순한 정치운동이나 이데올로기 투쟁이라는 피상적인 측면으로만 이해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소비에트 과학’, 아니 소련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20세기에 시도되었던 대규모의 인류사적인 실험으로 파악한다. 인류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이, 언어와 민족의 관계를 학문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고 고민했던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민족과 언어의 문제를 더욱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우리에게도, 그의 사색은 귀중한 지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스탈린 언어학 정독'/ 다나카 가츠히코 지음/ 이와나미서점▼

이연숙(히토츠바시대 교수·사회언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