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인종적 구분이 각 인종의 유전적 특징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인간의 게놈을 더욱 자세히 조사하게 되면서 이 같은 믿음이 점차 굳어져 가고 있다.
과학자들은 어떤 사람을 언뜻 보고 나서 그 사람이 백인인지, 흑인인지, 동양인인지 구분하기는 쉽지만 인간의 게놈과 DNA를 조사해서 표면으로 나타난 특징 밑에 숨어 있는 인종적 특성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쉽지가 않다고 말한다.
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종족은 진화론적 관점에서는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너무나 넓은 지역에 퍼져 살고 있기 때문에 피상적인 특징들을 제외하면 생물학적으로 서로 다른 집단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기회가 아직 없었다는 것이다.
셀레라 제노믹스사의 J 크레그 벤터 박사는 “인종은 과학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개념”이라며 “우리는 모두 아프리카를 떠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간 작은 부족으로부터 지난 10만년 동안 진화해 나왔다”고 말했다.
벤터 박사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인종을 구분하는데 흔히 이용되는 피부색, 눈동자 색, 코의 모양 같은 특징들이 비교적 소수의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므로 호모 사피엔스의 짧은 역사 속에서 극단적인 환경의 압박으로 인해 신속하게 바뀔 수 있었다고 말한다. 즉, 적도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아마도 자외선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검은 피부를 갖게 됐을 것이고, 고위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희미한 태양빛으로도 비타민 D를 더 잘 생산할 수 있도록 창백한 색깔의 피부를 갖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의 뇌는 소소한 차이점들을 훌륭하게 구분해 내도록 만들어져 있어서 외모의 차이가 지니는 의미를 과장해서 ‘인종’이란 개념을 만들어냈다. 에모리의대의 분자 유전학 교수인 더글러스 월러스 박사는 “사람들이 인종을 구분할 때 이용하는 기준은 전적으로 외형적인 특징에 바탕을 두고 있다”며 “우리가 이러한 차이를 구분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은 서로 다른 사람들을 각각 구분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종족에게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외형적 특징들을 결정하는 것은 아주 소수의 유전자들뿐이다. 반면 지성, 예술적 재능, 사교적 능력 같은 특징들은 인간의 게놈을 구성하고 있는 8만여 개의 유전자 중 수천, 혹은 수만 개의 유전자들에 의해 결정된다. 게다가 이 많은 유전자들은 모두 복잡한 조합을 이루어 활동하고 있다. 클리블랜드에 있는 케이스 웨스턴대의 유전학 교수 아라빈다 차크라바티 박사는 이렇게 많은 유전자의 조합들이 인류가 전 지구상으로 퍼져 나간 짧은 기간 동안 ‘인종’에 따라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을 것이라는 생각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학자들이 인종의 구분을 의미 없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타대의 인류학 교수 앨런 로저스 박사는 “나는 인종 구분이 우리에게 매우 유용했다고 생각한다”며 “인종간의 모든 차이점들이 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런 차이점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고 우리 종족의 기원과 이동 경로에 대한 정보가 거기에 들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또 캐나다에 있는 웨스턴 온타리오대의 심리학 교수 J 필립 러시튼 박사는 오래 전부터 흑인, 백인, 황인종 사이의 유전적 차이가 평균 지능지수와 범죄 성향의 차이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 아시아인들이 가장 커다란 뇌와 가장 높은 지능지수를 갖고 있으며, 아프리카 인들은 가장 작은 뇌와 가장 낮은 지능지수를 갖고 있고, 유럽인들은 두 집단의 중간쯤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이 러시튼 박사의 연구 결과를 반박하고 있다. 우선 뇌의 크기와 지능 사이에 분명한 연관관계가 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학자들은 또한 단백질 생산에 간여하지 않는 유전물질을 조사한 결과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유전적 차이의 88∼90%가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반면, 인종간의 유전적 차이는 10∼12%에 지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유전병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특정 유전병이 특정한 민족 집단에만 나타나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맨해튼에 있는 노스 제너럴 병원의 해럴드 프리먼 박사는 앞으로 이런 연구들이 더욱 진행된다면 인종문제로 인한 인류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두개골의 크기를 재고 인종적 차이와 분류를 강조하면서 처음 인종문제를 일으킨 것이 바로 과학이었다”며 “이제 과학자들은 인류의 진화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킴으로써 우리가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http://www.nytimes.com/library/national/science/082200sci―genetics―rac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