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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닥터의 건강학]허갑범교수/당뇨병분야

입력 | 2000-03-07 20:06:00


연세대의대 1층 건물에선 매주 한번씩 오전 10시반을 전후해 똑같은 풍경이 벌어진다. 오전 회진을 마친 허갑범교수(63)와 의대생들이 휴게실로 우르르 몰려드는 강의시간. 30분으로 예정된 ‘만두 강의’다. 그런데 만두를 먹으며 하는 이 강의가 제 시간에 끝나는 날은 거의 없다.

허교수가 “자, 오늘은 여기까지”하고 휴게실을 나갔다가 복도에서 다시 학생들을 불러놓고 계속 얘기하기 때문. 복도강의에선 “오늘은 여기까지”와 “참 이건 얘기안했는데…”가 되풀이된다. 그래서 허교수의 별명이 ‘오늘은 여기까지’. 강의의 단골 메뉴는 ‘21세기형 의사’다.

“21세기는 과학 정보 생명공학의 시대입니다. 생명공학 특히 의학은 빼놓을 수 없는 분야입니다. 환자 치료도 중요하지만 질병을 예방하고 새로운 약물이나 치료법을 개발해 진료환경을 개선해주는 게 진정한 21세기 의사의 길입니다.”

허교수는 1998년 2월부터 대통령 주치의를 맡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외국순방이나 여름휴가 등 어쩔 수 없을 때만 수행하고 보통 때는 평소와 다름없이 환자를 돌본다.

“질병만 치료하는 소의(小醫)보다 사람을 치료하는 중의(中醫), 나아가 국가를 위해 큰 일을 하는 대의(大醫)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허교수가 항상 후배들에게 강조하는 말이다. 그 자신이 모범이 되려고 애쓴다. 환자에게 항상 소탈하게 웃는 얼굴로 대한다. 그가 ‘하회탈 의사’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 진료때 스킨십도 잦다. 불룩 튀어나온 환자의 배를 만지며 “이거 위험합니다. 빼야 합니다”란 말을 수없이 반복한다.

1964년 의사국가시험 1등에게 주는 송촌 지석영상 등 많은 상을 받았지만 그중 특히 자랑스러워하는 상이 있다. 1901년부터 4년 동안 고종의 어의(御醫)였던 독일 의사 리하르트 분쉬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분쉬의학상. 1997년 수상했다.

“분쉬는 저같은 양의(洋醫) 대통령 주치의의 원조입니다. 서민을 위한 의료봉사에 힘쓰다 1911년 장티푸스에 걸려 마흔 둘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 진정한 대의였습니다.”

허교수는 1986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 내분비학회에서 “한국인의 6.6%가 ‘영양실조형 당뇨병’이며 서양인 당뇨병환자의 70% 이상이 비만이지만 한국인은 75%가 마른 체구”라고 발표했다.

당시 당뇨병은 인슐린의 양이 적은 ‘1형’과 인슐린의 기능이 떨어지는 ‘2형’만 학계에 알려졌으나 허교수가 ‘한국형 당뇨병’(1.5형)이란 새로운 종류를 제시한 것. 그의 연구 성과는 개발도상국과 열대지역 등 후진국에서의 당뇨병 예방에 기여했으며 1997년 미국 당뇨병학 교과서에 실렸다.

1995년엔 일본 우베에서 열린 한일당뇨병심포지엄에서 내장지방이 많고 팔다리의 근육이 적은 ‘거미형 인간’이 당뇨병 고혈압 동맥경화증 등 성인병에 걸릴 위험이 높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당뇨병의 발병은 단순비만과 관련이 깊다는 기존의 통념을 깨고 ‘배와 다리의 싸움’에 의해 결정된다는 내용으로 당뇨병 치료의 새 전기를 마련한 것.

1년에 그가 돌보는 환자는 1만4000여명이다. 95%가 합병증 없이 지낸다. 허교수는 인슐린이 제기능을 하도록 만드는 약과 당뇨병 합병증 치료약을 개발중이며 2002년을 목표로 한국인 당뇨병의 치료지침을 연구하고 있다.

대통령 유럽순방을 하루 앞둔 1일 오후 2시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2시간에 걸친 인터뷰 내내 손목 발목을 돌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양팔을 쫙 뻗어 엘리베이터 양쪽 벽을 잡았다.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당뇨 등 성인병을 막는 지름길입니다.”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양어깨 허리 무릎 목 등 관절운동 후 정원 나뭇가지를 철봉 삼아 턱걸이와 매달리기를 한다. 비행기 안에서도 관절운동 만큼은 빼놓지 않는다.

“나이를 먹으면 자연히 체중이 늘면서 다리가 붓고 관절이 약해집니다. 하지만 나는 오래 서 있어도 허리 아픈 줄 모릅니다.”

스트레스와는 체질적으로 거리가 멀다. 주말엔 고향 안성에 있는 농장에서 정원을 가꾸며 피로를 푼다.

“가지치기를 할 때는 무아지경에 빠집니다. 자연속에서 땀흘리며 일하는 것 자체가 저에겐 운동인 동시에 휴식입니다.”

▼원인과 예방▼

“당뇨병은 어머니 자궁에서부터 시작된다. 튼실한 아기를 낳도록 각별히 조심해라.”

큰 딸과 며느리가 아기를 가졌을 때 허갑범교수가 들려준 말이다. 2.8㎏ 이하 저체중아로 태어난 아기는 커서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정상체중에 비해 3배 이상 높다.

그러나 너무 큰 아기도 문제. 4㎏ 이상의 아기를 낳으면 산모가 당뇨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

40대 이상의 연령층이 갑자기 살이 찌면 당뇨병에 걸릴 가능성도 높아진다.

특히 30대를 넘어서면 복부비만 조심. 허리둘레를 엉덩이 둘레로 나눈 비율이 남성 0.95, 여성 0.91 이상이면 즉시 식사조절과 운동에 들어가야 한다.

속보 조깅 줄넘기 사이클 등 유산소운동이 효과적. 운동은 인슐린의 효능을 떨어뜨리는 구루카곤 등 스트레스 호르몬의 양도 줄여준다.

부모 중 한쪽이 당뇨인 경우 자식이 당뇨병에 걸릴 확률은 3분 1, 양쪽이면 3분 2. 따라서 가족 중에 당뇨병환자가 있는 사람은 40대 이후 정기적인 혈당 체크를 해야 한다.

▼어떻게 뽑았나▼

당뇨병 분야 ‘베스트 닥터’로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 내분비내과의 허갑범교수가 선정됐다. 허교수는 서울대 이홍규교수, 가톨릭대 손호영교수와 집계 막판까지 1위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이는 동아일보사가 16개 대학병원 내과 교수 45명에게 당뇨병 부문 베스트 닥터를 추천받아 집계한 결과.

이교수는 국내 처음으로 당뇨병에 대한 역학조사를 실시, 당뇨치료의 체계적인 지침을 마련했다. DNA의 이상이 당뇨병 발병의 주요 원인임을 세계 처음으로 규명해 국제 당뇨학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손교수는 한국인 당뇨환자의 베타세포(췌장에서 인슐린 분비를 관장하는 세포) 기능에 관한 연구의 권위자. 최근 베타세포 배양과 이식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1위 허갑범(연대 세브란스) △2위 이홍규(서울대) △3위 손호영(가톨릭대 성모병원) △공동 4위 이기업(울산대 서울중앙) 이현철(연대 세브란스) △공동 6위 김광원(성균관대 삼성서울) 이병두(인제대 상계백) △8위 유형준(한림대 한강성심) △9위 김옹진(을지대 서울을지) △공동10위 박경수(서울대) 최영길(경희대) 최동섭(고려대) 13∼20위에는 △이문규(성균관대 삼성서울) △백세현(고려대) △김진우(경희대) △김영설(경희대) △김현만(아주대) △김성연(서울대) △민헌기(삼성서울) △이태희(전남대)교수가 올랐다.

gd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