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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걸 스탠더드/담배 유해론]「죽음의 연기」 손배訴

입력 | 1999-04-07 21:07:00


『흡연은 중독성입니까?』

“그렇습니다.”

“암을 유발합니까?”

“그렇습니다.”

97년 3월 20일 라크와 체스터필드 담배를 제조하는 리게트그룹이 미국 담배회사로는 처음으로 담배 유해론을 법정에서 인정했다. 이 회사는 10대를 판촉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도 시인했다. 미국에서 집단 담배소송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 증언으로 사실상 백기 항복이었다.

97년 6월 20일 워싱턴 DC의 한 호텔 기자회견장에서 미시시피주의 마이크 무어 주검찰총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오늘은 담배와의 전쟁에서 미국민이 승리한 날입니다. 건강문제를 유발했다면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무임승차는 끝났습니다.”

미시시피주정부가 필립 모리스, 브라운 앤 윌리엄슨 등의 담배회사 등을 상대로 처음으로 집단대표소송을 제기한 뒤 3년만에 첫 일괄타결안이 나온 것이다. 이로써 지역주민들이 담배로 인해 건강을 잃어 발생한 엄청난 의료비를 담배회사가 물어내게 됐다. 다른 주정부도 소송을 냈다. 결국 담배업계는 40여개 주정부 검찰총장들과 3천6백85억달러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는 타협안을 선택했다.

주민들의 건강권을 대변한 주정부의 승리였다. 매스컴의 관심은 대단했다. ABC방송은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기자회견을 생방송 중계했다. 뉴욕타임스는 1면에 보통 전쟁 또는 재난 때나 쓰는 대문짝만한 제목을 사용했다.

그러나 1차합의는 무산됐다. 상원에서 합의안을 인준하기 위한 반(反)담배법안을 마련하면서 △배상액수를 5천1백60억달러로 인상 △담배 제조업자들의 법적 면책권의 거부 등 내용을 포함했다. 담배회사들은 치열한 홍보와 로비전을 펼쳐 입법안을 부결시켰다.

하지만 98년 11월 미국 담배회사들은 2천60억달러(약 2백50조원)라는 민사상 최고 배상금을 25년간에 걸쳐 46개 주정부에 지급하기로 최종 합의했다. 야외광고 및 판촉활동 금지, 금연연구 활동비지급, 금연캠페인 자금 지원 등도 포함됐다. 이와 별도로 미시시피주 등 4개주는 4백억달러 보상에 합의했다. 변호사 비용도 사상 최고액. 미시시피 텍사스 플로리다주의 소송변호사들이 받은 수임료만 81억달러여서 과다수임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했다.

이를 계기로 전세계에서 담배와의 법정 전쟁이 불붙었다. 과테말라 등 6개 국가는 미국 담배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자국내 담배시장에서 미국담배 점유율이 상당히 높아 담배로 인한 질병 치료비를 부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끽연자들의 천국 프랑스. 지역의료보험연합이 국영 담배회사와 외국회사를 상대로 미국형 담배소송을 제기했다. 환경공해 분야에서도 오염자 부담 원칙이 확립돼 있는 만큼 똑같은 원칙을 담배에도 적용하자는 취지다. 스페인과 일본에서도 비슷한 소송이 진행중이다.

미국 담배소비자들의 개별소송도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90년대 중반까지 법정은 담배회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젠 달라졌다. 제조업자는 자기 상품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엄격한 책임보상의 개념이 도입되고 있다.

지난달 30일 폐암으로 사망한 남성흡연자의 유족이 필립 모리스를 상대로 소송을 내 이겼다. 손해배상액 8천1백만달러. 개인소송 사상 최고액이다. 흡연으로 인한 암 유발사실을 알면서도 담배를 팔았다는 것이 승소판결 이유다. 원고는 1천1백만달러를 청구했는데 판사가 징벌적 배상(피고의 악의적 행위에 대한 처벌성격의 손해배상)을 적용해 배상액이 껑충 뛰었다.

과연 담배의 어떤 성분이 건강에 해로운가. 몸의 건강을 해치는 것은 타르성분, 인이 박여서 담배를 끊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니코틴의 역할이다. 한국금연운동협의회 김일순회장는 “담배연기 속에는 4천여종의 화학물질이 들어있으며 증명된 발암물질만 20가지”라고 말했다.

담배규제의 역사는 길지 않지만 그 속도는 무척 빠른 편. 64년 미국 공중위생국에서 흡연이 폐암 등을 유발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한 뒤 95년 식품의약국은 니코틴을 중독성 마약의 일종으로 규정해달라고 대통령에 건의했다.

한국정부는 담배에 관한 한 ‘병주고 약주는’ 입장이다. 정부가 소유한 공기업에서 담배를 제조하고 병이 나면 의료보험제도를 통해 치료비를 부담한다.

정부는 2000년까지 담배인삼공사를 민영화할 계획이다. 집단담배소송에 대한 대책은 아직 무대책이다. 공사 관계자는 “국민정서가 미국과는 다른 만큼 담배소송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털어놓았다.

흡연으로 인한 국가의 재정적 부담은 얼마인가. 85년경 연세대 이규식교수 조사에 따르면 당시 흡연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5천57억원. 조기사망으로 인한 생산성감소, 질병발생 관련비용 등이 포함된 비용이다. 지금은 그 액수가 수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무심히 지내는 사이에 미국 담배회사와 변호사들은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1년전 한 미국회사 임원이 한국에서 제기될지 모르는 담배소송에 대비해 한국로펌들을 인터뷰했다. 미국 법률사무소는 국내로펌에 전문을 보내‘미국담배회사를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함께 제기해보자’고 제안했다.

오용석변호사는 “정부도 앞으로 미국의 사례를 연구해 국익보호 차원에서 철저하게 담배소송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지킬 수 없다”고 강조했다. 세기의 소송은 이제 막이 올랐을 뿐이다.

〈고미석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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