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가 조금씩 풀리면서 서울 명동 사채시장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최근 기존 자영업자 외에 여유돈을 보유한 퇴직자 전문직종사자들이 소액전주(투자자) 대열에 가세하면서 ‘어음 중개상’인 사채업자들이 바빠졌다.
명동의 사채업소는 외환위기 이후 작년 1년동안 약 1백여개가 문을 닫았다. 남아있는 2백∼3백개 업소중 상당수가 ‘파이낸스’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H파이낸스의 한 관계자는 “어음을 사려는 사람이 팔려는 사람보다 더 많아 중개해줄 어음이 부족한 상태”라고 전했다.
▽초보 전주의 등장〓사채시장하면 으레 1백억원대의 자금을 굴리는 거액전주가 연상된다. 오남영(吳南永)탑파이낸스고문은 “아직도 거액전주들이 사채시장을 지탱하는 주요 자금원이지만 최근에는 1억∼3억원대의 소액전주들이 사채시장 돈줄의 20∼30%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작년초 연 20% 이상의 고금리 금융상품에 뭉칫돈을 투자한 퇴직자와 자영업자들이 최근 금리가 폭락해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못하고 사채시장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한 사채업자는 “요즘 은행권 금융상품은 세금을 떼고 나면 연 6% 이자에 그치지만 사채시장에서 어음을 구입하면 세금 부담없이 최소 연 20%의 이익을 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어음 있어요〓A파이낸스 관계자는 “하루평균 약 4억원 가량의 어음을 퇴직자 등 소액전주들에게 팔고 있다”면서 “부실기업이 발행한 C급어음마저 심심찮게 나간다”고 털어놨다.
A파이낸스는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대상 기업인 M실업의 4천만원짜리 물대어음(상거래어음)을 한 전주에게 월 1.5%로 할인해 팔았다.
이 투자자는 어음만기일인 3월20일까지 40여일만에 90여만원의 투자이익을 얻을 수 있다.A파이낸스 관계자는 “M실업이 워크아웃 대상기업으로 확정되려면 적어도 워크아웃 종료일인 3월23일 이전에 돌아오는 물대어음을 결제해야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어음”이라고 설명한다.
오남영고문은 “사채시장에서 월 5∼6% 등 지나친 고금리를 제시하는 어음은 부도 위험이 있으므로 피해야 한다”며 “초보 투자자들은 수익이 적더라도 안전한 5대그룹 어음에 투자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C급어음이 사라진다〓사채시장 어음은 발행회사의 재무상태와 지명도에 따라 A B C급으로 분류된다.
사채업자들도 외환위기 직후에는 ‘언제 부도날지 모르는’ C급어음 할인을 극도로 기피했지만 올들어서는 이런 C급어음을 구하기도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한 사채업자는 “외환위기 이후 ‘살인적인’ 고금리가 지속되면서 부실한 C급어음을 발행하던 회사들이 대부분 정리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시중금리가 급락하고 은행들이 중기대출을 적극 취급하면서 C급어음 할인금리가 월 1.5%대(연 18%)로 뚝 떨어졌다”며 “5대그룹 이외의 어음은 대체로 B급으로 분류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강운기자〉kwoon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