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소설]마이너 리그(4)

입력 | 1998-10-23 19:07:00


숙부인 ②

백일장 대회가 열리는 공원에서였다. 국민학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소희를 만난 것이었다.

소희는 아카시아꽃 아래에 혼자 앉아 있었다. 연필 쥔 손으로 턱을 괸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소희를 발견한 순간 나는 머리가죽이 팽팽히 당겨지는 것 같았다.

그 당시 여학생 교복은 동복과 하복뿐인 남학생과 달리 춘추복이라는 한 단계가 더 있었다. 봄과 가을이라는 계절 탓인가. 내 눈에는 춘추복 입을 무렵의 여학생들이 가장 순결하고 예뻐 보였다. 더욱이 소희는 국민학교 때 이미 수십 통의 연애편지를 받은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 중에는 내가 대필한 것도 두 통이나 되었는데 나는 지금까지도 그처럼 절실하고 신나면서 약오르는 글쓰기를 해본 기억이 없다.

소희의 눈부시게 하얀 옷소매에서 뻗어나온, 역시 눈이 부신 흰 손가락이 8절지 시험지를 사각사각 채우기 시작했다. 나 역시 찔레덤불 뒤에 앉아서 진지하게 작품구상을 하기도 하고 신중히 몇 글자 끄적이기도 했다. 소희가 시험지를 제출하러 일어났으므로 나는 엉거주춤 뒤를 따라갔다. 그러다가 잔뜩 물이 오른 실버들나무 앞에서 그만 소희의 눈에 띄고 말았다.

“너 김형준 아니니?”

소희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듣자 내 다리에서는 힘이 쑥 빠져나갔다. 목이 메어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퉁명스럽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 다음부터는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 소희가 다가와 반갑다는 인사를 한 것, 내가 안경을 써서 못 알아볼 뻔했다고 말한 것, 아직도 책을 많이 읽는 모양이라고 하길래 가까스로 ‘글쎄’ 하고 되디된 발음으로 대꾸한 것, 겨우 그 정도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소희는 사라지고 없었다. 꿈을 꾼 것 같았다.

그러나 꿈은 아니었다. 내 눈앞에는 소희의 머루알 같은 검은 눈이 아른거렸다. 두 갈래 땋아 늘인 머릿단 뒤로 솜털이 보송보송하던 귓불, 그리고 교복 깃이 브이자로 패인 곳 아래 불룩한 가슴의 곡선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또 소희가 들고 있던 공책 겉장에 씌어진 푸른색 잉크 글씨도 또렷이 기억났다. 펜팔부 2―장미반 양소희.

이따금 나는 생각한다. 나에게 결점이 있다면 단 한 가지이다. 나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받고 싶어하는 것, 남들 표현에 따르면, 즉 자랑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펜팔부에 들면서 나는 나머지 4인방에게 소희 이야기를 약간 들려주었다.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말하나마나 승주였다. 승주는 펜팔부를 제대로 한 번 운영해볼 중대결심을 했다며 그 일환으로 소희네 펜팔부와의 교류를 제안했다. 성취욕구가 과잉발달한 탓에, 찾아다니면서 일을 저지르는 조국이 가만 있을 리 만무했다. 당장 편지를 보내자고 서둘렀다. 하지만 여학교로 보내진 남학생의 편지는 생활주임 선생의 손에서 갈갈이 찢어지는 게 정해진 순서였다.

트랜드뉴스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