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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채시장 「큰돈」이 꿈틀댄다…5대재벌등 찾아 「입질」

입력 | 1998-10-19 19:31:00


이달초 모은행 서울 H지점. 단정한 양복차림에 서류가방을 든 중년남자들과 머리를 짧게 깎은 건장한 청년 50여명이 모여들었다.

흥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이들 중 몇명이 지점장실에 들어가고 문이 닫히자 고함소리가 새나왔다.

“지점장, 이럴 수가 있는 거요.”

“그게 아니라 일이 꼬여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5대그룹 계열의 A사는 지난달 1천억원대의 융통어음을 발행, 소문내지 않고 자금을 조달하려 했다. 기껏해야 수십억원 할인되는 서울 명동 사채시장 대신 한꺼번에 할인해줄 수 있는 거물급 전주(錢主)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거물급의 돈을 굴려주고 있다’는 대리인으로부터 ‘할인해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A사의 자금담당 K이사는 반가우면서도 불안했다. 이런 거래가 금융가에 알려지면 회사는 부도날 수도 있다. K이사가 그에게 말했다.

“H지점에 단 하루만이라도 예금해 당신의 현찰동원 능력을 검증시켜주면 협상을 시작하겠소.”

전주의 대리인은 양도성예금증서(CD)와 현금 등을 차명으로 예금시켜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H지점을 찾았다. 그런데 H지점에는 지점장에게 돈 쓸 곳을 알아봐달라고 이미 부탁해두었던 수십명의 전주 대리인들이 몰려와 있었던 것. A사가 돈을 구한다는 소문이 사채업계에 퍼지자 거래를 하기 위해 달려든 사채자금은 무려 5조원. A사는 외부로 알려질 것이 두려워 융통어음 할인을 포기했다.

사채업계에서 H지점은 돈이 필요한 사람을 전주와 연결시켜주고 현찰동원 능력을 검증해주는 복덕방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H지점은 1천억원이 넘는 수신 평균잔액을 유지하고 있다. 이 정도면 대형시중은행 지점 중에도 중상위 이상 규모다.

중소기업의 어음거래가 끊기면서 어음이나 채권을 할인하는 서울 명동 사채시장은 썰렁하기만 하다. 그러나 대기업 및 중소기업을 상대로 수십억∼수백억원대의 대출을 하거나 5대재벌 계열사의 어음을 할인해주겠다는 전주들의 암중모색은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있다.

▼누구의 돈일까〓전주 대리인은 전주가 ‘현재 정계의 실세’ ‘과거 실력자’, 심지어 ‘외국 독재자’라고 밝히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은 거짓말이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지적한다. 대체로 과거 부동산 투기 등으로 모은 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탈세혐의가 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나서는 것을 꺼린다.

한 관계자는 “전주들은 세금을 피해 안전하게 상속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거부들로 나이는 70∼80대가 많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자신이 알 수도, 밝힐 수도 없다고 말했다. 이들 전주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몇명씩이 모여 돈을 수백억원 단위로 만든 다음 이를 굴린다는 것.

▼얼마나 되나〓1백조원이 된다는 설부터 수조원대일 것이라는 설이 나돌 정도로 추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전주를 대행하는 브로커가 워낙 여럿이기 때문에 10조원 안팎의 돈이라도 1백조원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설명.

▼영수증을 싫어한다〓대기업은 사채자금을 쓴 뒤 이자비용을 손비처리하기 위해 영수증을 세무서에 제출하기 때문에 전주의 존재가 국세청에 통보되는 셈. 이 때문에 거액 전주들은 중소기업과의 거래를 선호한다. 중소기업중 금융기관 대출한도는 꽉 찼으나 담보 여력이 남아있는 기업의 리스트를 보험 종금사 등을 통해 입수한 뒤 개별적으로 접촉한다.

업계 관계자는 “사채업자들도 5대그룹 계열사와 접촉을 시도했다가 막판에 영수증 문제 때문에 거래가 무산되는 경우를 많이 목격했다”고 말했다.

▼싼금리, 높은 수수료〓금액과 기간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연10%의 이자를 받는다. 최근에는 제도권 금리인하에 따라 9%대의 거래가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거래를 중개한 브로커가 챙기는 수수료가 12∼13%대에 이르고 있어 1년 미만으로 빌릴 경우에는 20% 이상의 금리를 무는 셈. 빌리는 돈이 1백억원이 넘으면 이자와 수수료가 한자릿수로 내려간다. 일부 자금은 연 2∼3%만 받는 경우도 있다.

▼사기꾼도 많다〓최근 파산한 건설업체 K사 관계자는 “지난해 거래의 증거로 그룹총수의 사인이 있는 명함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며 “총수의 사인을 악용하려는 사기꾼인 것 같아 거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채시장에서 20여년간을 종사해온 K씨는 “파격적인 이자로 거금을 꾸어주겠다는 사람들의 뒷조사를 해보면 사기전과자인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한 관계자는 “요즘도 여당이나 청와대를 들먹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정계 실력자 운운하거나 영수증 처리를 꺼리는 구시대적 업자들이 사라져야 사채시장이 틈새 자금시장으로서의 건전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용재기자〉y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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