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가 말허는 것줌 봐. 우리 아줌니는 그런 사람은 아니여.
―아니기는. 어쨌든 병식씨가 수원에 봐둔 가게도 있고하다면서.
이야기가 들리는 동안 나는 아마도 잠이 들었었던 것 같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기 전에 그런 말소리들이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윽고 멀어졌으니까. 낮잠에서 깨어나 마주친 이 세상은 아주 낯설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있었으니까.
왜, 어린 시절엔 낮잠에서 깨어나면 그렇게 서러웠을까, 푸르스름한 저녁 빛이 이 세상에 내려앉을 때, 화단에 심어진 파초나 담장따라 올라간 연분홍빛 월계꽃 이파리조차 푸른 필터를 끼운 것처럼 보이는 아침인지 저녁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 순간에 말이다.
잠이 들면서 언니가 세탁소를 차려 떠난다, 어쩌구 하는 소리를 들은 뒤끝이라 눈을 떠서 언니가 보이지 않자 그래서 나는 울었고, 내 귀로 들리는 나의 울음소리가 하도 처량해서 더욱 악을 쓰며 울었다.
하지만 봉순이 언니는 내가 울기 시작하자 미자언니네 방안으로 얼른 달려왔고, 잠을 깨서 우는 나를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꼬옥 안아 주었다. 그러면, 푸르스름한 세상이 조금씩 노란 빛을 띠기 시작했고 얼마간은 설움이 가셨다.
아직도 봉순이 언니는 내가 서러울 때 내가 따돌림당할 때, 내가 혼자 외로울 때 나를 안아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엄마였고 언니였고 그러면서 친구인 그녀는 어쩌면 내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내가 다시 살포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봉순이 언니는 이불 속에 없었다. 처음있는 일도 아니었다. 골목으로 난 창밖에서 천장으로 안으로 느티나무 그림자가 요괴인간의 긴 손가락 같이 뻗어 있었다. 쥐 오줌으로 얼룩덜룩해진 천장의 장방형의 무늬가 창백해지면서 그 평면의 천장을 뚫고 파란 얼굴을 한 누군가가 입체의 얼굴을 내밀 것만 같은 공포. 너무 많은 무서운 이야기들을 들었던 게 탈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하지만 이불을 뒤집어쓰고나면 정말로 천장의 파란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서 다시 두 눈 아래로 이불을 내리고, 아직은 천장에 파란 얼굴이 없는 것을 확인하며 몹시 뒤척이고 있었다.
몇번이나 일어나서 어머니의 방으로 건너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가면 내 무서움은 가시겠지만 어머니가 봉순이 언니의 부재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차라리 혼자서 무서움을 참는 편을 택했다.
나는 그 후에 혼자서 미자언니에게 놀러가곤 했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골목길을 우우, 누비며 몰려다녔고, 가끔, 혹시나 이제라면 그들이 나를 끼어주지 않을까 손가락을 빨며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던 날들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아예 나 같은 건 처음부터 알지도 못했다는 듯 우우, 몰려 뛰어가 버렸다.
그러던 어느날 미자 언니는 그집 현관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뒷짐을 진 그녀의 손이 나팔 바지 뒤로 가 있었고 그곳에서는 아직 다 꺼지지 않은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