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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김학준/바보들의 행진

입력 | 1997-10-15 20:30:00


바버라 터크만의 역사평론 「바보들의 행진」은 언제 읽어도 재미와 더불어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받은 이 미국의 여기자는 깊은 통찰력으로 세계사에서 정치인들이 어떻게 제 나라를 망치는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녀의 해답은 간단하다. 정치인들의 아집이나 독선이 전쟁을 만들어내고 정쟁을 유도하며 그 결과 제 나라를 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 길로 가면 나라에 해를 끼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오로지 정적을 골탕먹이겠다는 발상에서, 심지어는 그 길이 경쟁자를 파탄내는 것도 확실하지만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도 상처를 줄지 모른다는 예측이 가능할 때도 우선 경쟁자부터 죽이고 보자는 단견에서 파멸로 가는 길을 걷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세계사를 「바보들의 행진」에 비유했다. ▼ 한심한 비자금 공방 ▼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자금 공방을 보노라면 그녀의 역사인식에 새삼스레 두려움마저 느끼게 된다. 동양에서건 서양에서건, 고대에서건 현대에서건 국정 책임자들의 아집과 독선이 나라를 망쳤던 그 「바보들의 행진」이 21세기 통일시대를 이끌어갈 대통령을 뽑는 이 중대한 시점에서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툭 터놓고 말해 비자금을 폭로하는 쪽은 진심으로 법과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는 비장한 애국심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가. 국민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자신들이 거부하는 또는 두려워하는 후보에게 상처를 입혀 반드시 낙선시켜야겠다는 아집과 독선에서 「깨끗한 정치」를 앞세워 대선정국을 폭로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가고 있다고 본다. 이 폭로전으로 선거가 21세기의 국가운영에 관한 정책토론의 계기가 되지 않아도 그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 주저앉는 우리 경제가 더 큰 부담을 안게 된다는 비명도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비자금문제를 아예 덮어두자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비록 정략적인 계산에서 제기된 의혹이라고 해도 그 의혹에 충분한 법적 근거가 있다면 사직당국의 엄정한 수사를 통해 흑백이 가려져야 할 것이다. ▼ 作爲의 정치는 실패한다 ▼ 더구나 개인적 부정축재의 의혹이 짙을 경우 그 의혹을 풀지 않고 대통령이 됐다고 생각해 보자. 상대방 흠집내기와 상대방 발목잡기를 특기로 삼는 우리 국내정치의 전통으로 미루어 그가 국정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겠는가. 아니 무엇보다도 국민 앞에 떳떳이 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상대방의 공격을 음해라고만 대답하지 말고 공명정대한 수사에 응하겠다고 대답하는 것이 옳다. 더구나 맞불작전으로 92년 대선자금을 건드리겠다고 위협한다면 그 역시 정도를 걷지 않는, 아집과 독선의 정치인이라는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동시에 폭로한 쪽은 국가의 공식적 수사기관 또는 조사기관이 아니면 손에 넣을 수 없는 자료들을 어떻게 확보했는지, 확보과정에 불법은 없었는지와 관련해 역시 사직당국의 엄정한 수사를 받아야 할 것이다. 만일 자료의 입수과정에 불법이나 위법이 개입됐다면 발표자뿐만 아니라 불법 또는 위법을 도운 기관 책임자들 역시 처벌되어야 법의 형평에 맞을 것이다. 세간에는 이 폭로전의 배후에 정계개편의 시나리오가 기다리고 있다는 추측이 나돌고 있다. 우리의 정치사가 일관되게 보여준 교훈은 밀실에서 음모된 작위(作爲)의 정치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이나 권력자들이여, 아집과 독선을 버려라. 그것만이 당신들이 늘 입에 올리는 애국의 길이요, 구국의 길이다. 김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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