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그룹은 22일 4개 계열사에 대해 화의신청을 했다고 발표하면서 『시간이 충분치는 않았지만 정부 및 채권단과 사전에 협의했다』고 밝혔다. 그러자 정부와 채권단은 『사전에 전혀 상의가 없었다. 뒤통수 맞은 기분』이라며 불쾌한 표정이었다. 「시장경제」를 내세우며 불간섭원칙을 고수했던 정부가 기아측의 사전협의가 없었다며 섭섭해 하는 것이다. 정부측과 기아는 사사건건 감정대립을 보여왔다. 지난달 중순 임창열(林昌烈)통상산업부 장관은 『김선홍(金善弘)기아그룹 회장과 만나 기아해법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반면 김회장은 『만난적이 없다』고 맞섰고 임장관은 「대질신문」 운운하며 회동사실을 강조했다. 기아측은 사후에 『회동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해놓고 임장관이 일방적으로 공개했다』며 군색한 변명을 했다. 감정대립은 끝이 없다. 기아측은 『정부가 기아를 삼성에 넘기려한다』며, 정부는 『기아경영진이 경영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지않고 잔꾀만 부린다』며 불신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정부―은행―기업간에 「신뢰의 틀」이 완전히 깨져 서로 책임을 회피하고 각자 이익만 챙기려 들고 있는 양상이다. 불신의 뿌리는 한보사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정권을 등에 업고 막대한 부채를 끌어다 썼던 한보그룹이 부도가 나고 정치사건으로 비화하면서 아무도 기업과 금융권을 보호해줄 수 없게 됐다. 금융권이 앞다퉈 대출자금회수에 나섰고 「구시대의 신뢰관계」가 깨지면서 대기업 연쇄부도가 잇따랐다. 「구시대의 신뢰」가 부활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은행이나 기업들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불확실성을 벗어나 「안심하고 각자 일을 할 수 있는」 안정된 룰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기아사태 해결만이 아니라 제2의 한보, 제2의 기아를 막기 위해서도 새로운 룰을 만들고 정부―은행―기업간의 신뢰를 일으켜 세워야 하지 않을까. 이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