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노동당비서가 북경주재 우리 대사관에 불쑥 들이닥친 지 반년만에, 이번에는 이집트주재 북한대사와 프랑스주재 북한무역대표부 대표 형제가 가족들과 함께 제삼국으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났다. 장승길 이집트주재 북한대사는 1년 전 아들이 제삼국으로 잠적했는데도 무사했을 만큼 김정일의 특별배려를 받던 인물이기 때문에, 황장엽비서 만큼 거물은 아니지만 언론의 조명을 받기에 충분하다. ▼ 냉전적 해석 벗어나야 ▼ 그러나 국내외 언론들이 보도하는 바와 같이 그들의 망명이 북한붕괴의 전조(前兆)인지, 망명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는 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주체사상의 대부(代父)로 평가 받아 왔고 당서열 20위권에 있던 황비서가 우리쪽으로 망명해 왔지만 북한은 아직 붕괴하지 않았다. 망명에는 체제에 대한 회의(懷疑)나 실망감 등 정치적 동기도 작용하겠지만, 말 못할 개인적 동기도 큰 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모든 망명을 구조적 현상으로 치부하는 데는 무리가 따를 수 있다. 또한 「붕괴임박」이나 「도미노」 등의 표현 속에는 냉전논리와 남북경쟁심리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북한과 1대1로 경쟁하던 단계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이제는 체제경쟁적 관점과 냉전논리에서 북한문제 및 남북관계를 해석하고 전망하는 수준은 벗어나야 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로서는 망명사건과 북한붕괴론을 연결하거나 망명객을 스타로 부각시키기보다는, 「지구촌 시대」 「정보화 시대」 「국제화 시대」의 뒤안길에서 바깥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 채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절대다수의 북한주민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더 깊은 고뇌를 해야만 할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크게 영향을 받을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북한당국이 내부적으로는 감시를 더욱 강화할 것이고 일시적으로 대남(對南)측면에서 경직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황비서 망명사건을 처리했던 북한측의 태도로 미루어 볼 때 앞으로의 남북관계나 4자회담, 경수로사업 등에 나쁜 영향이 미치지는 않을 것 같다. 남북관계야 더 나빠질 수도 없을만큼 바닥인 탓도 있겠지만 4자회담이나 경수로사업 추진과정에서 북한 스스로 치부를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유연하게 나올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 정부로서도 이번 사건의 추이를 차분하게 지켜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섣불리 한국행을 서두르거나 필요 이상의 홍보논리를 내세운다면 앞으로의 남북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4자회담 악영향 없을것 ▼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우리 내부로 눈을 돌리는 일이다. 고위층 망명 때마다 북한 경제난을 들먹이면서 북한붕괴 임박을 예언하는 경향이 있으나 사실은 「내 코가 석자」인 것이다. 정치는 정책대결과 거리가 먼 이런 저런 시비의 수준에 머물러 있고 집권말기의 권력공백 상태에서 환율급상승과 대기업 부도나 해체가 방치되고 있다. 가난에 익숙한 북한은 오히려 그럭저력 살아갈 수 있지만 흥청망청하던 한국경제에서 거품이 빠지고 정치마저 혼미해지면 정말 혼란이 올 것이다. 북한경제는 도와줄 나라라도 있지만 우리 경제는 도와줄 나라도 없지 않은가. 정세현 (민족통일 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