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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에세이/21세기 앞에서]먼저 숲을 보자

입력 | 1997-06-09 20:47:00


내가 일을 하고 챙기는 데는 내 나름의 몇 가지 원칙과 습관이 있다. 먼저 목적을 명확히 한다. 보고를 받는다면 보고의 목적과 결정해야 할 일을 분명히 한다. 다음은 일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파악한다. 본질을 모르고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는다. 본질이 파악될 때까지 반복해서 물어보고 연구한다. 나는 자주 「업(業)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신이 하는 일의 「업의 개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황한다.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는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손을 들어 달을 가리키며 달을 보라고 외치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만 쳐다보고 있다면 어찌 되겠는가? ▼ 대소완급 구분해야 ▼ 목적과 본질 파악이 나의 원칙이라면 숲을 먼저 보고 나무를 보려고 하는 노력은 나의 습관이다. 동양과 서양은 크게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주소 표기법이다. 우리는 「국가」 「시 도(市道)」 「시 군 구(市郡區)」 「동 읍(洞邑)」의 순으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서양은 그 반대이다. 나는 동양의 주소 표기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좋아한다. 일을 함에 있어 대소완급(大小緩急)의 구분도 매우 중요하다. 이런 구분은 곧 일의 본질에 바탕을 두고 우선순위를 판단하는 일이다. 어떤 공장을 방문했을 때 본공장 건설이 한창인데 조경공사는 마무리 단계에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공장건설이 최우선인데 정원을 먼저 가꾸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 대소완급을 구분하지 못한 대표적인 경우다. 최종결심을 하기 전에 챙겨봐야 할 또 하나 중요한 일은 정보의 확인과 활용이다. 통상 우리는 있는 사실(데이터)과 정보(인포메이션)를 구분하지 못한다. 지금 현재 어떻게 되어 있는가의 사실 파악은 데이터이지 정보가 아니다. 정보란 그같은 사실을 내가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환율이 올랐다는 사실은 데이터이다. ▼ 「일의 주인」이 되자 ▼ 환율이 오르는 데서 오는 득실은 무엇이고 환차손을 줄이고 환차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곧 정보이다. 데이터를 보고 읽는 관점에 따라 정보의 내용과 질은 달라진다. 따라서 필요에 따라 관점을 달리하고 이를 의사결정에 반영하는 것이 곧 정보활용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목적과 본질을 알았고 숲과 나무를 보았으며 대소완급의 판단아래 관련 정보까지 활용하여 최종 결심을 했다면 다음은 일이 되도록 진행시켜야 한다. 일을 하는데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능동적인 사람과 「시키는 대로 한다」는 수동적 사람이 그것이다. 수동적인 사람은 일에 이끌려 가는 노예가 되어 자율과 창의가 없다. 그래서 나는「일의노예」가되는 사람보다 「일의 주인」이 될 줄 아는 사람을 찾아 일을 맡긴다. 이건희(삼성그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