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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공동체를 위하여]뿌리깊은 「봉투」관행…온나라 부패

입력 | 1997-04-17 08:23:00


작년 7월. 당시의 禹贊穆(우찬목)조흥은행장은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鄭泰守(정태수)한보그룹총회장을 만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우행장은 정씨가 승용차 트렁크에 실어준 사과상자를 열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사과를 몇개 덜어내자 1만원권 지폐 1백장씩 한묶음으로 2백다발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던 것이다. 『(대출)협조를 해줘서 고맙습니다. 과일상자를 준비했으니 갖고 가시지요』라고 말하며 웃음을 짓던 정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행장의 가족들은 투신자살한 장남의 얼굴이 떠오르니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면 좋겠다고 몇달전부터 졸라대던 터였다. 우행장은 이 돈을 돌려줄지 말지 한동안 고민하다 「떡 본 김에 제사지내듯」 아파트 중도금을 내는 데 그만 써버렸다. 2개월 뒤 우행장은 같은 장소에서 정총회장을 다시 만나 2억원이 든 사과상자를 또 받아왔다. 그는 이번에는 「양심의 가책」도 별로 느끼지 않고 이 돈으로 아파트 잔금을 치렀다. 이에 앞서 95년 10월. 당시의 李喆洙(이철수)제일은행장은 역시 하얏트 호텔에서 정총회장으로부터 현찰로 1억원을 받는다. 그는 우행장보다는 돈을 받는 데 훨씬 익숙한 편이었다. 이행장은 현금 1억원을 세로로 8천만원, 가로로 2천만원씩 쌓아 담은 비닐 쇼핑백을 건네받고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검찰에서 『승용차가 있었지만 기사의 눈을 의식해 모범택시를 이용했다』고 진술했다. 정씨는 이같은 「돈질」로 대통령의 측근을 비롯한 정치인과 은행장 등의 코를 꿰어 건국이후 최대의 금융비리를 저질렀다. 이 때문에 경제가 밑동부터 흔들린지 오래됐다. 차기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에서부터 입법부의 수장인 국회의장까지 검찰의 조사를 받게되는 서글픈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온 나라가 총체적인 위기를 맞고있다. 억대 뇌물만 문제가 아니다. 경찰 세무서 구청 은행 병원 학교 등 「떡값」이나 「촌지」가 통하지 않는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크고 작은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국민들이 부패고리의 한쪽에 얽혀서 돌아가고 있다. 자녀교육 문제로 학교에 가고 싶어도 「봉투」를 준비해야 할지 빈 손으로 갈지 고민하는 학부모들이 많은 게 우리의 현실이다. 엄마가 학교에 다녀간 뒤 자신을 보는 선생님의 눈빛이 달라진 사실을 체험한 아이들이 자라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돈으로 가득찬 사과상자가 오가는 부패한 사회일지라도 우리 아이들이 미래를 꿈꾸고 준비해가는 학교만큼은 맑고 투명한 곳으로 남아있어야 합니다』(吳星淑·오성숙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장) 원래 떡값이란 「인정의 표시」였지만 이제는 「대가를 바라는 뇌물성 금품」으로 뜻이 변해버린지 오래다. 이같은 부패고리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독불장군」이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그래서 『힘들게 살 필요있나』 『현실이 그런데 뭘…』이라며 자기합리화를 한 뒤 현실과 타협하는 경우도 적지않다. 한국사회병리연구소장 白尙昌(백상창)박사는 『우리들의 집단 무의식속에는 무엇인가를 바쳐야 무사하다는 생각이 깔려있다』고 그 원인을 분석했다. 이같은 의식과 관행 때문인지 법관들도 뇌물을 주고 받는 사람들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지난해의 경우 기소된 뇌물사범 가운데 1심에서 집행유예 등으로 풀려나온 사람이 절반이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런 가운데 지난 8일 서울지법이 불구속재판을 받던 전안경사협회장 金泰玉(김태옥)씨를 법정구속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김씨는 李聖浩(이성호)전보건복지부장관의 부인 朴聖愛(박성애)씨에게 1억7천만원을 준 혐의로 구속됐다 보석으로 풀려났었다. 『피고인의 범죄는 고위공무원에 대한 불신과 비난,나아가 조소(嘲笑)를 불러왔고…』 재판장이 김씨를 준엄하게 나무란 뒤 법정구속한다고 말하자 그의 얼굴빛은 일순간 흙빛으로 변했다. 최근 들어 법조계에는 뇌물을 받은 사람보다 준 사람이 더 나쁘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全斗煥(전두환) 盧泰愚(노태우)전대통령 비자금사건의 1심공판을 맡았던 서울지법 金榮一(김영일)북부지원장의 신념은 확고하다. 그는 두 전직대통령 재판때 뇌물을 준 사람에게는 관대했던 법원의 관행을 깨고 노씨에게 뇌물을 준 재벌총수들에게도 대부분 실형을 선고했다. 『주는 사람이 없으면 받는 사람도 없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부패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뇌물공여자부터 철저히 단죄해야 한다』 〈최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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