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석도 조수석도 비었지만 택시 핸들은 저절로 돌아갔다. 스스로 깜빡이 켜고 차선을 바꿨고, 길가에 잠시 정차한 차량도 요리조리 피해 갔다. 이곳은 중국 상하이 북서부 자딩구 안팅 일대. 1984년 독일 폭스바겐과 상하이자동차(SAIC) 합작사의 첫 중국 공장이 들어서 중국 자동차 산업의 전초기지 역할을 해온 곳이다. 중국의 이 똘똘한 로보택시는 10km 남짓한 구간을 누빈 뒤 출발지로 돌아왔다.
최근 ‘2026 동아 인공지능·혁신(AI & INNOVATION) 아카데미’ 연수 프로그램으로 중국 상하이를 다녀왔다. 많은 기업인들이 최근 중국으로 ‘미래 혁신 탐방’ 연수단을 보내고 있다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실제로 가보니 변화의 흔적이 느껴졌다. 자딩구 일대도 그중 하나였다. 전통 자동차 산업의 거점이었던 이 지역은 이제 완전 자율 로보택시가 달리는 미래 모빌리티 실험장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사실 자율주행 체험기는 차고 넘쳐서 로보택시 체험 자체가 신기하진 않았다. 정작 흥미로웠던 건 그 로보택시를 운영하는 중국 스타트업 포니 AI(Pony.ai)의 펀딩과 글로벌 전략이었다.
중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으리라 예상하고 정부 지원 규모를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국유기업 계열 투자사에서 투자를 받긴 했지만, 글로벌 진출을 고려해 정부의 직접 투자는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미중 갈등 속에 중국 지원 기업이라는 꼬리표가 미국과 유럽 진출에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이두 출신 엔지니어들이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설립한 포니 AI는 중국에서 주로 운행 데이터와 자율주행 실적을 쌓고, 글로벌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조달해 해외 시장으로 진출하는 투트랙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이 회사의 투자 파트너사 목록에는 도요타, 엔비디아, 우버, 알리페이, 캐나다 연기금, 중국 머천트캐피털 등 중국 국내외 기업 및 기관이 올라와 있었다.
투자 유치에 있어 운행 실적은 중요한 지표가 된다. 중국 정부는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선전 등에서 완전 무인 자율주행 운행 허가를 차례로 내줬다. 그 덕에 적자를 보는 스타트업 포니 AI의 누적 자율주행 운행 거리는 올해 3월 기준 4500만 km에 달한다. 한국 전체 자율주행 누적 운행 거리(지난해 11월 기준 1306만 km)의 3배가 넘는다.
중국 빅테크 바이두의 유럽 진출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스위스 정부는 최근 바이두에 레벨4 자율주행 운행 허가를 내줬다. 스위스 시골길의 대중교통을 지원하는 수준이지만 시장에선 바이두의 유럽 상륙작전 신호탄으로 본다. 앞서 중국 우한에서 바이두 로보택시 100대 이상이 동시에 멈춰서는 사고도 있었지만 각국 정부와 투자자들은 결국 ‘해 봤던 기업’에 높은 점수를 준 셈이다.
자율주행뿐이 아니다. 중국의 수많은 AI 기업들은 홍콩 증시 기업공개(IPO)를 통해 글로벌 자금 조달에 속도를 내고, 해외 시장 선점에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올해 1분기(1∼3월) 홍콩 IPO 시장이 2021년 이후 역대 최대 규모로 커진 이유다.
한국도 국민성장펀드나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을 통해 AI 산업을 키우고 있다. 장기 투자 여력이 부족한 한국 기술 생태계에서 정책금융의 역할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기업들이 실제 시장에서 경쟁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며 ‘해봤다’는 레퍼런스를 쌓을 수 있도록 ‘실험장’을 열어주는 일이다. 그래야 실적을 토대로 투자를 유치하고 글로벌 시장을 뚫을 수 있다.
아직 한국에서 그런 실험장을 보긴 어렵다. 로보택시는 규제에 막혀 걸음마 상태고, AI 기업들도 정부 예산 경쟁에 더 힘을 쏟는다는 말도 들린다. 정부가 새로운 ‘판’을 깔아주는 것이 가장 우선돼야 하는 이유다.
Most View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