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현지 시간) 오후 8시 반경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고위 인사들을 겨냥한 총격 사건이 벌어진 워싱턴의 힐튼 호텔. 백악관 출입기자협회(WHCA) 만찬 행사가 열린 이곳엔 트럼프 대통령, J D 밴스 부통령 겸 상원의장(2순위),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3순위),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5순위),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6순위),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7순위) 등 미 고위 인사가 대거 참석했다.
최근 담석 수술을 받아 자택이 있는 아이오와주에서 요양 중이던 미국 권력 승계 서열 4순위인 척 그래슬리 상원 임시의장 겸 공화당 상원의원을 제외하면 핵심 최고위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을 포함한 각료들은 무사히 대피했다. 그럼에도 행사의 보안 수준이 허술했다는 비판이 속출하고 있다. 정부 유력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는데도 ‘국가 특별 보안행사(NSSE·National Special Security Event)’로 지정되지 않아 상대적으로 보안 절차가 철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뉴스위크에 따르면 마이클 매콜 공화당 하원의원은 “만약 폭발물이 터졌다면 대통령, 부통령, 하원의장이 모두 사망했을 수도 있다”며 보안 부실을 질타했다. 또 이번 행사에선 대통령 등 유고시 국정 운영을 총괄하는 역할을 하는 ‘지정생존자(Designated Survivor)’가 지정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더욱 커지고 있다.
● 국정 운영 연속성 위한 지정생존자
미 헌법센터 등에 따르면 미국은 1984년부터 대통령 국정연설일에 지정생존자를 발표하는 관행을 이어오고 있다. 지정생존자는 어떤 순간에도 국정에 공백이 없어야 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관행으로, 성문화한 법 규정은 아니다. 대통령의 취임식과 국정연설처럼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고위직이 한꺼번에 참가하는 공식 행사에서 테러나 핵 공격 등 불상사가 벌어지는 상황에 대비하자는 차원이다.
통상 백악관 비서실장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할 지정생존자 1명을 지정해 수도 행사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비밀 장소에 대기시킨다. 옛 소련도 적의 핵 공격에 대비 1950년대부터 지정생존자 제도를 비밀리에 운용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건국 후 대통령 유고 상황은 9차례 발생했다. 총 8명의 대통령이 임기 중 사망했고,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은 하야했다. 이때 권력은 모두 당시 부통령이 이어받았다.
캐럴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WHCA 만찬 행사를 앞두고 지정생존자를 지정하지 않았다고 27일 밝혔다. 그는 “만찬 행사 전에 지정생존자 관련 논의가 있었지만 승계 순위에 있는 여러 장관이 개인적 이유로 참석하지 않아 지정생존자를 정해 두는 건 불필요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 설명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 또한 상당하다. 지정생존자 제도의 목적은 국가 최고지도부가 동시에 공격받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대통령 권한 승계 및 군 통수권·핵 지휘 체계가 즉각 유지되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설령 레빗 대변인의 설명대로 상당수 고위 인사가 불참했고, 이들이 외부에 있어 정부 기능의 연속성은 유지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권력 서열 1∼3위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는 상황에서 사전에 지정생존자로 지정된 인물이 없었다는 점은 큰 문제였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 백악관, 이번 주 트럼프 보호 위한 조치 논의
이번 사건을 계기로 대통령과 국가 지도부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절차·규정에 새로운 의문이 제기되면서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을 어떻게 보호할지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27일 워싱턴포스트(WP)는 수지 와일스 백악관 비서실장이 곧 백악관 비밀경호국(SS)과 국토안보부 수뇌부를 소집해 이번 사태에서 얻은 교훈을 논의하고 대통령 보호를 위한 추가 조치를 논의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백악관이 보안 체계 재검토에 나선 건 올해 미 건국 250주년을 기념해 트럼프 대통령이 참석할 대형 행사들이 줄줄이 예정된 것과도 맞물려 있다. 특히 워싱턴에선 자동차 경주와 종합격투기 UFC 경기 등이 열리는데, 각각 수만 명의 관람객이 몰릴 것으로 보인다. 백악관 관계자들은 WP에 “와일스 실장이 이런 대형 행사에서 대통령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추가 방안을 논의할 것”이라고 전했다.
신진우 nice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