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감사실로 호출된 날, 김준비(가명) 씨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정년 이후에도 현금이 나올 수 있는 일을 별도로 해 온 것이 문제가 됐다. 2024년 말 감사를 시작한 회사는 2025년 초 그를 해고했다. 51세로 정년이 9년 남은 때였다. 회사는 재직 기간 다른 일까지 문제 삼아 소송을 제기했고, 2025년 말에 그는 벌금까지 냈다. 전화기 너머의 그는 “회사 동료들과 연락이 다 끊겼다. 여전히 조용히 숨죽여 산다”고 했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정년이 지나면 5년간 없는 것은 확정된 미래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 어떻게 가만히 있나. 그걸 대비하느라 임대업과 숙박업 등을 조금씩 해 왔다. 소득 공백은 국가가 만든 것 아닌가. 그 짐을 국민 개인에게 떠넘겨 각자도생의 길로 내모는 건 옳은 일인가.”
정년(停年)은 멈추는 해라는 의미로 ‘직장에서 물러나도록 정해져 있는 나이’라는 뜻이다. 우리 사회는 정년을 연장하는 문제로 다시 씨름하고 있다. 2013년 ‘최소 60세 이상’으로 법이 개정되면서 그 전에 관행적으로 55세 혹은 58세이던 정년은 60세로 바뀌었다. 13년이 지난 지금은 정년으로 65세가 거론된다.
하지만 입법 논의는 더디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당초 지난해 말까지 입법을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23일 입법 추진을 6·3 지방선거 이후로 미루겠다고 했다. 이해관계가 첨예하니 다양한 계층의 얘기를 더 듣겠다는 명분이다. 선거를 앞두고 혹시 있을지 모를 민심 이반을 우려한 정치적 계산의 결과겠지만 처한 사정에 따라 입장 차는 크다.
청년은 자신들의 일자리가 준다고 반대한다. 단계적 정년 상향 방안에 대해서는 혜택을 받지 못할 수 있는 60년대 중후반 출생 연령층은 빠르게 일률적으로 정년을 올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기업은 임금 부담 등을 이유로 반대한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을 위한 잔치라며 소외감을 느낀다.
정년을 연장한다고 하니 연금 수령 시기를 더 늦추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온다. 국제통화기금은 연금 개시 연령을 68세로 권고했지만 정부와 여당은 일단 선을 긋고 있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공론화위원회는 연금 개시 연령을 68세로 높이는 안을 검토했다가 올해 초 폐기했다. 너무 부작용이 크고 현실성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불씨가 꺼진 건 아니다.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29일 정년과 함께 연금을 받는 연령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연금이 늦어지면 비정규직의 고통은 더 커진다.
대부분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은 연금을 받을 때까지 일하는 제도를 가지고 있다. 정년이 아예 없고, 있더라도 연금 수령 시기까지 일할 수 있다. 한국만이 유일하게 소득 공백을 제도적으로 방치 중이다.
한국 사람들은 2023년 프랑스의 연금개혁 시위가 과격한 것에 놀랐고, 연금 수령 시기가 2년 늦춰지면서 자동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간도 2년 더 늘고, 연금 수급액이 더 늘어나는데도 그렇게 격렬하게 반대하는 것에 또 놀랐다. 프랑스 사람들은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노년의 시간이 줄어든다며 반대했다. 논의 수준의 차원이 다르다.
소득 공백 방치는 1998년 김대중 정부 때 국민연금을 개혁한다면서 연금 수급 연령을 2033년이면 65세가 되도록 바꾸면서 시작됐다. 정년을 올리는 입법이 추진될 때마다 2013년에도 겪었던 청년 일자리 감소와 기업 부담 논란을 매번 겪을 것이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정년과 연금 개시의 일치를 천명해야 한다. 당장 실현은 어렵더라도 이 자명한 원칙을 밝혀 두고, 언제까지 구현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국민 노후의 안녕은 체제나 이념, 연금재정 부족을 이유로 훼손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이런 원칙이 있어야 소득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겸업 금지 규칙의 완화 같은 과도기 보완책도 다양하게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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