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이 돼서 어머니 한 번 업어드리지 못한 게 평생의 한이었는데…. 이렇게 그림 속에서나마… 어머니를 업어드립니다.”
그림 속 76년 전 헤어진 어머니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심구섭 씨(89)의 손 끝이 떨렸다. 눈시울은 붉어졌다. 열세 살 소년은 백발이 됐지만 그림 속 어머니는 주름 하나 없이 고운 얼굴이다. “학교 잘 다녀오라.” 북에 두고 온 심 씨의 남동생을 데려오기 위해 어머니가 다시 월북하던 날 남긴 마지막 말이다. 심 씨는 “그날 아침 일찍 일어나 교복을 다려 입혀주시고는 대문 밖에서 배웅해주시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을 이틀 앞둔 25일 경기 파주시 한반도생태평화 종합관광센터. ‘그리운 얼굴’ 전시가 17일 개막한 가운데 1세대 이산가족 심 씨는 어머니를 등에 업은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작품 ‘침묵의 강’ 앞에 서서 70년 넘게 쌓인 그리움을 곰삭였다. 그의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 근처 신상. 1947년 9월 부모와 함께 월남했지만 어머니는 심 씨가 강릉사범중학교에 첫 등교하던 날 남동생을 데려오기 위해 다시 고향으로 향했다.
이 작품은 이만수 성신여대 동양화과 교수(62)가 2017년 심 씨에게서 사연을 듣고 석 달간 그린 것이다. 이 교수는 “그림 하나로 이산가족의 한을 위로할 순 없지만 그림을 통해 엇갈린 두 모자가 헤어지지 않고 함께 있는 순간을 염원했다”고 말했다.
다음 달 20일까지 무료로 열리는 이 전시는 조각, 회화, 사진 등 여러 분야 예술가들이 심 씨와 같은 1세대 이산가족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남기는 ‘그리운 얼굴 프로젝트’의 결과물 56건으로 구성됐다. 2017년 시작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예술가와 1세대 이산가족은 현재까지 각각 56명. 팬데믹으로 2년 반 넘게 멈췄던 프로젝트는 이달 재개됐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단법인 ‘우리의 소원’의 하종구 상임이사는 “분단국가의 예술가로서 역할을 고민하다가 뜻이 맞는 이들과 힘을 합쳤다”고 말했다.
함경남도 북청군이 고향인 김명철 씨(87)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고향에 두고 온 어린 시절 추억을 찾았다. 21일 전화로 만난 김 씨는 고향 집을 떠나던 1950년 12월 7일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열네 살이던 그는 사이렌이 울린 뒤 대문 앞에서 어머니와 형에게 “일주일 뒤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쌀 주머니에 가족사진을 넣어뒀는데 설상가상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때 흥남부두에서 주머니를 도둑맞았다. 김 씨는 “도둑맞은 추억에 미련 갖지 않으려 일부러 속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았다”며 “차라리 남은 추억이 없다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했다”고 했다.
김 씨를 만난 이익태 작가(76)는 고향에서 학교 다닐 때 소고를 배웠다고 말하는 김 씨의 얼굴에서 천진난만한 미소를 포착했다. 그리고 손에 소고를 든 김 씨의 모습을 그렸다(작품 ‘심장의 북소리’). 김 씨는 그림을 보고 “고향의 기억을 모두 잊고 살아왔는데, 이제 이 작품 하나가 내게 남았다”고 했다.
서울 동대문구에 사는 실향민 윤일영 씨(87)도 22일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김서경 조각가를 만났다. 작품은 1년 뒤 완성될 예정이다. 윤 씨의 고향은 경기 장단군 장도면 오음리(미수복지구). 경기 연천군 경순왕릉 언덕 위 전망대에 서면 휴전선 너머 고향이 보인다. 그는 “고향 뒷산 지척에서 한 발자국도 다가서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의 소원’은 이산가족과 실향민 250여 명의 사연을 작품으로 계속 만들어 전시를 열겠다고 밝혔다.
파주=이소연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