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November. 08, 2016 07:22,
Updated November. 08, 2016 08:39
반드시 직접 가서 관람하길 권한다. 인쇄된 작품 사진으로는 도무지 실물의 질감을 전할 길 없다. 내년 3월 1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유영국, 절대와 자유’전. 여러모로 어지러운 일상에 깊고 단단한 위로를 은근히 안기는, 치열한 붓질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사진으로는 그저 뭉툭한 형상의 색색 도형만 눈에 들어올지 모른다. 하지만 실물 그림 앞에 서면 각각의 ‘살갗’이 도드라져 다가온다. 사람의 인상에서 피부 결이 차지하는 비중이 의외로 크듯 유영국 화백(1916∼2002·사진)의 그림과 마주할 때 표층의 질감이 전하는 감흥의 몫은 상당하다.
유 화백은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 문화학원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어린 시절 뱃사람이 되기를 꿈꿨던 그는 유학 후 한동안 부친 소유 어선을 타기도 하고 6·25전쟁 중에는 폐허가 된 고향 양조장을 복구해 운영하며 술지게미를 사료 삼아 돼지를 치는 등 강인한 생활력을 발휘했다.
학생 시절부터 구태의 강압에 저항적이었던 유 화백의 성향은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한 후 더욱 뚜렷해졌다. 그는 1948년 김환기 화백의 추천으로 서울대 미대 교수직을 맡았지만 2년 만에 사직했다. ‘예술의 자유로운 발전을 도모하겠다’고 주창한 30대 작가들의 모임 ‘50년미술협회’ 멤버로 참여한 뒤 학교 측으로부터 “좌파 성향 협회 참여와 교수직 중 하나를 택하라”는 요구를 듣고 택한 길이었다. 이후 “고루한 파벌의 폐해를 버리지 못한다”며 국전 참여 권유를 누차 거부했다. 1966년 홍익대 교수로 부임했지만 4년 뒤 근무일수가 주 3일에서 6일로 늘자 “전업 화가로서 정체성을 지키겠다”며 사직했다.
그는 “산과 숲 많은 고장에서 자라 산과 숲을 많이 그렸다. 산은 내 앞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고 말했다. 새벽 어스름을 막 타고 넘은 수풀 안개 위로 빛줄기가 쏟아진다. 산등성 뒤로 별이 긁혀 떨어진다. 애써 조급하게 앞서 나가려 한 기색을 찾을 수 없음에도 세련미가 가득하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과 전혀 다른 흐름의 호방함이다.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일찌감치 추상미술의 길을 선택해 평생 신념을 이은 에너지에 대한 질문에 유 화백은 늘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고 싶었다’고 답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유학 시절부터 1964년 서울 신문회관 첫 개인전까지의 전반기, 돌연 작가그룹 활동을 그만두고 홀로 작업에 몰두한 후반기 작품을 두 층에 나눠 걸었다. 총 100여 점. 이따금 적잖은 유형 변화를 시도하며 한번 시도한 유형을 상당 기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1977년 심근경색으로 심장박동기를 부착한 뒤 별세할 때까지 거듭 뇌중풍으로 쓰러지며 차츰 손끝 힘이 떨어져 간 흔적도 캔버스 위에 선연하다.
유 화백은 “예순까지는 기초를 좀 해보고 이후 자연으로 더 부드럽게 돌아가 보자는 생각으로 그렸다. 그림 앞에서 느끼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 새로운 각오와 열의를 배운다”고 했다.
알지 못할 위로의 정체는 아마 열의의 온기였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