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민증 까자는 말을 흔히 듣는다. 주민등록증을 꺼내 서로의 신상을 확인해보자는 뜻이다. 주민등록번호에 나이, 생일, 성, 출생신고지 등 개인에 관한 다양한 정보가 담겨 있어 생긴 말이다. 이번에 그런 정보들이 줄줄 샜다. 신용카드번호나 은행 계좌번호 등은 유출되더라도 변경할 수 있고 아예 없앨 수도 있지만 주민번호는 평생을 따라다닌다. 한번 유출된 정보는 어떤 방법으로도 회수가 불가능하다.
국민 개개인에 별도의 고유 번호를 부여하는 현행 주민번호 시스템은 관리 및 이용의 편리성이 매우 뛰어나다. 때문에 다른 개인정보를 주민번호 위에 층층이 쌓아서 이용하고 있다. 하지만 일단 주민번호가 유출되면 그 위에 쌓인 어떤 정보도 안전할 수 없다. 예컨대 주민번호를 알면 개인의 금융정보나 신용현황은 물론 병원이나 학교를 해킹해서 병력(), 성적표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이번에 1억여 건의 개인정보 유출로 국민 대부분이 정보범죄 위험에 노출된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외국 사례를 참고해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없는지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현행 체계를 유지한 채 주민번호의 수집 보관 관리에 대한 통제만 강화할 경우 이미 노출된 정보에 대한 대책이 없다. 개인식별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바꾸거나, 최소한 기존 주민번호에 별도의 암호코드를 추가해야 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주민번호 제도 자체를 뜯어고치라고 안전행정부에 권고했다. 식별기호 자체엔 아무 의미가 없도록 임의의 숫자조합으로 대체하고, 법원 허가를 얻어 이 기호를 바꿀 수도 있게 하라는 것이다. 헌법재판소 산하 헌법재판연구원도 지난해 주민번호에 담긴 정보의 양에 주목해 주민번호는 개인정보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제한해 기본권의 침해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유엔 인권위 역시 2008년 주민등록제도 재검토 및 주민번호 제공 제한을 권고했다.
미국에서는 사회보장번호와 운전면허 번호를 주민번호 대신 사용한다. 독일에서는 10년마다 신분증을 갱신 발급하고 있다. 식별기호엔 아무런 정보가 없으며, 사유가 있으면 바꿀 수 있다. 반세기 이상 사용해온 주민번호 시스템을 교체하려면 상당한 불편과 비용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방치하다가는 주민번호가 정보범죄 재앙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정보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제도 개편에 따른 비용과 편익을 열린 자세로 비교 분석해 선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