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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의 그마음, 시공 넘어 우리곁에

Posted December. 10, 2010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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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2월 25일 프랑스 동양학자 폴 펠리오가 실크로드의 요충지인 중국 둔황() 막고굴()에 도착했다. 중앙아시아조사단을 구성해 중국 신장()위구르지역의 카슈가르에 들어온 지 1년 5개월만이었다. 펠리오의 머리 속엔 온통 둔황문서였다. 신장위구르에 머물 때 둔황 막고굴에서 귀중한 고문서가 발견됐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막고굴 도착 다음날부터 펠리오는 현지 조사에 착수했다. 곧바로 왕 도사를 만났다. 왕도사의 이름은 왕원록((녹,록)). 900년 둔황 막고굴로 흘러들어와 도사 노릇을 하던 사람이었다. 어느날 막고굴 16굴을 청소하던 중 우연히 17굴 석실을 발견했다, 그 안엔 3m가 넘는 높이로 무수히 많은 고문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고문서를 수장하고 있다고 해서이 17굴을 장경동()이라 부른다. 왕 도사는 일종의 관리인 역할을 하게 됐다.

왕 도사를 통하지 않고는 둔황 문서를 만날 수 없는 상황. 그래서 펠리오가 왕도사를 찾은 것이다. 펠리오에 앞서 이곳을 찾았던 러시아 탐험가에겐 석실의 존재조차 알려주지 않았고 영국의 오렐 스타인에겐 석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도 못하게 했던 왕 도사였다. 그러나 펠리오는 유창한 중국어 앞에 왕도사는 무너지고 말았다. 왕 도사는 결국 석실 조사를 허락했다.

1908년 3월 3일, 조사가 시작됐다. 펠리오는 첫날 10시간 동안 쭈그려 앉아 고문서를 조사했다. 대부부 610세기의 귀중 문서들이었다. 한문 경전 뿐 아니라 다양한 언어의 고문서로 가득했다. 펠리오는 이 석실이 동양학의 보고라고 생각했다. 펠리오의 조사는 3주 동안 계속됐다.

조사 과정의 어느날, 펠리오는 앞 뒤 일부가 떨어져 나간 필사본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서명도 저자명도 떨어져 나간 상태였지만 펠리오는 숨이 멎는 듯 했다. 그건 틀림없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었다. 펠리오가 중앙아시아 탐험에 앞서 혜림의 일체경음의()를 읽었고 거기 나오는 왕오천축국전임의 내용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그동안 습득했던 동양학에 대한 지식, 한자와 중국어 실력 덕분이었다.

펠리오는 왕 도사에게 흥정을 했다. 17호 석실 안에 있는 모든 문서를 팔라는 흥정이었다. 왕도사가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펠리오는 그를 끝없이 설득했고 결국 왕 도사는 펠리오에게 넘어갔다. 펠리오는 중요 문서 6000여 점을 선별해 500냥이라는 헐값으로 입수했다. 펠리오는 5월 30일 둔황을 떠나 10월 5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문서를 포장해 프랑스로 부쳤다. 왕오천축국전은 곧바로 파리에 있는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이듬해인 1909년 5월 펠리오는 이 사실을 학계에 보고했다. 1915년엔 일본인 학자 다카구스 준지로는 혜초가 신라 승려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실크로드와 왕오천축국전을 연구해온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은 혜초를 한국 최초의 세계인이라고 단언한다. 혜초는 704년경 신라 수도인 경주에서 태어났다. 그가 719년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밀교를 공부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4년 뒤인 723년 열하홉 살 때 그는 인도로 구법 기행을 감행한다.

광저우를 출발해 뱃길로 인도에 도착한 혜초는 불교의 8대 성지를 순례한 후 서쪽으로 간다라를 거쳐 페르시아와 아랍을 지나 다시 중앙아시아를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는다. 이어 쿠차와 둔황을 거쳐 727년 11월 당나라 수도인 장안(지금의 시안)에 도착했다. 장장 4년에 걸친 약 2만 km의 대장정이었다.

왕오천축국전엔 그의 대장정의 여정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왕오천축국전은 다섯 천축국(인도의 중국식 명칭)을 돌아보고 쓴 글이라는 뜻. 그러나 이 기행문엔 다섯 천축국을 비롯해 서역 지방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가득하다.

왕오천축국전은 발견 당시 앞 뒷부분 일부가 훼손된 상태였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총 227행에 5893자. 세로 28.5cm, 가로 42cm 크기의 종이 아홉 장을 붙여 만들었다. 총길이는 358cm. 막고궁 장경동에서 발견된 두루마리 필사본에 대해선 혜초가 직접 썼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혜초의 원본을 보고 누군가 필사했을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에 대해 국립중앙박물관의 오영선 학예연구사는 어느 쪽인지 정확이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필사했을 경우 그 연대는 10세기 이전이라고 보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라고 보았다.

혜초의 천축 여행은 기본적으로 구법()여행이었다. 동천축국 여행에서의 주된 관심은 불교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천축 남천축 서천축 북천축으로 옮겨가면서 혜초의 관심은 불교에 머무르지 않았다. 정치 경제 사회는 물론이고 의식주와 같은 일상생활, 언어 지리와 기후 등 자연환경으로 호가장되었다. 인간 삶과 관련된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한 것이다. 혜초는 구법의 길을 떠난 밀교승이었지만 동시에 호기심 가득한 문명탐험가였다. 혜초를 한국 최초의 세계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여행 길은 실크로드를 관통했다. 혜초는 4년 동안 여행을 하면서 고향땅 경주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왕오천축국전을 보면 그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가 나오기도 한다. 먼 이국 땅에서 달 밝은 밤,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계림()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싣사. 계림은 경주를 말한다. 이 시는 그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입증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혜초는 이처럼 고국을 그리워했으나 당나라 땅 장안에서 밀교를 연구하다 780년 76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이국 땅에서의 그의 죽음은 어쩌면 세계인으로서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정 소장의 말. 혜초는 사상 최초로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를 해로와 육로로 일주하고 현지 견문록을 남겨 동서문명교류사에 있어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분명 한국 최초의 세계인이다.



이광표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