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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역사 속으로 떠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며

[사설] 역사 속으로 떠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며

Posted August. 19, 2009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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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이 어제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민주화 투쟁을 하며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 속에서도 인동초()처럼 살았던 고인이지만 노령에 찾아온 병고를 이기지는 못했다. 부디 저 세상에서 안식과 평화를 누리길 기원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김 전 대통령만큼 극적인 삶을 살며 큰 족적을 남긴 인물도 드물다. 고인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상고() 졸업의 학력으로 국회의원 6선()을 거쳐 제15대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것도 민주화의 도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상 초유의 외환위기를 단기간에 극복해 한국경제의 풍랑을 가라앉힌 것도 큰 업적이다. 대통령 재임 시절 분단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그 공로로 우리나라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고인은 불굴의 투지로 역경을 극복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정치인이었다. 국회의원 선거에 네 번째 출마해 비로소 금배지를 달았다. 대통령 당선도 네 번의 도전 끝에 이룰 만큼 남다른 집념의 소유자였다. 무엇이든 철저히 준비하는 치밀한 성격이었다. 늘 책을 읽고 공부를 했으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수첩을 꺼내들고 적었다. 다방면에 걸쳐 박식()했던 것도 이런 노력 덕분이었다. 중요한 연설을 할 때면 언제나 거울을 보며 연습해 달변이면서도 말실수가 거의 없었다.

대통령이 되기까지 그의 인생 역정은 험난한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민주화를 열망한 국민에겐 태산 같은 지도자였으나 군사정권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하에서 그는 무려 55차례나 가택연금을 당했고 6년여 동안 감옥에 갇혔다.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일본과 미국으로 망명을 떠난 적도 있다. 일본 망명 중에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돼 죽을 고비를 넘기며 국내로 압송됐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미국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러한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힘을 합쳐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화를 앞당기는데 기여한 그의 공로는 국민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더불어 3김() 시대의 한 축이었던 그는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지역주의의 피해자인 동시에 수혜자였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첫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함으로써 국민에게 실망을 안겼다. 그 후 우리 정치가 이념과 정책보다는 정치공학적 타산()에 의해 뭉치고 헤어지는 행태를 거듭해온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3김 시대는 고인의 집권을 끝으로 사실상 저물었지만 한국정치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지역주의와 이합집산() 그리고 대의민주주의를 스스로 부정하는 극한투쟁의 정치풍토는 아직도 남아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인은 후배 정치인들이 함께 풀어야 할 숙제를 남겨놓고 갔다.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우리 사회의 이념 갈등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는 현상도 해결해야 할 심각한 과제이다. 지난해 광우병 촛불시위와 올해 노무현 전 대통령 조문() 정국 때 고인이 보인 처신은 아쉬움을 남겼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된 현직 대통령을 독재자로 규정하며 공격함으로써 공동체의 균열을 키우기 보다는, 국민통합에 앞장섰더라면 더 많은 존경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북()정책은 고인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부분이다. 남북정상회담 등을 통해 남북간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고 인적 경제적 교류와 협력, 이산가족 상봉을 활발하게 이끈 것은 성과였다. 개성공단 사업이나 금강산 관광도 북한의 도발과 억지로 우여곡절이 계속되고 있지만 앞으로 좋은 결실을 맺는다면 그의 업적으로 남을 수 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의 대가로 4억5000만 달러를 북에 비밀리에 건네주었으며, 햇볕정책의 의도와는 달리 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데 실패했다. 그런 햇볕정책에 집착함으로써 오히려 김정일 정권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돕는 결과를 낳았고, 그 과정에서 남남()갈등을 키웠다.

고인은 자신이 당한 고초를 거울삼아 대통령 재임 시절 인권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그의 임기 중 인권 관련 제도의 개선이 있었다. 그러나 인권 대통령이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정보기관의 불법 감청을 근절하지 못했고, 북한 동포들의 인권문제는 외면하다시피 했다. 정치적 세무조사 등을 통해 비판언론을 탄압했다는 논란도 후일 역사의 검증을 받을 것이다.

이제 그는 영욕과 포폄을 넘어 역사 속으로 떠났다. 그의 발자취가 이 나라의 민주 발전과 경제 번영, 평화 통일의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 국민의 애도 속에 그를 떠나보내는 장례절차가 경건하고 엄숙하게 진행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