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을 연 시기에 3개국 중산층은 두꺼워졌을 뿐 아니라 풍요로운 삶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다. 3국은 올림픽을 발판으로 세계무대로 도약했다.
그 이후 일본은 최근 역동성을 잃고 있고 한국 사회도 성숙사회의 초입에 들어서면서 사회 변화를 겪고 있다. 13억 인구의 중국은 경제성장과 사회주의 체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미증유의 실험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도쿄에서 베이징까지의 44년간은 아시아 위상이 한껏 높아진 시기이기도 하다. 아시아가 낙후지역에서 벗어나 잠재력과 역동성을 가진 지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준 계기가 바로 올림픽 개최였다.
세계로 뻗는 도약대=1964년 도쿄 올림픽 당시 일본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835달러. 이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3300달러다. 가구당 흑백 TV 보급률은 80% 정도.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올림픽 개최가 결정된 1981년 1800달러였던 한국의 1인당 GDP는 1988년에는 4000달러 정도. 지난해 중국의 1인당 GDP는 2400달러대다.
물론 경제규모는 다르다. 지난해 세계 4위였던 중국의 경제력은 올해 세계 3위로 올라설 것으로 전망되며 21세기 중반에는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올림픽 직전까지 세 나라 모두 두 자릿수에 가까운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올림픽이 세계로 향하는 도약대가 됐다.
3개 도시는 올림픽을 전후해 도로와 교통망 등 인프라 정비가 빠르게 진행됐다. 도쿄 올림픽 직전인 1964년 10월 도쿄오사카 간 신칸센이 뚫렸다. 지하철과 수도고속도로가 이때 완비됐다.
베이징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공항터미널이 문을 열었고 시속 300km의 고속철도가 개통됐다. 중국이 올림픽을 앞두고 올림픽에 직접 쏟아 부은 비용은 경기장 건설비 132억 위안을 포함해 2932억 위안(약 43조9800억 원). 나아가 중국이 2001년 7월 이후 투자한 간접비용까지 포함하면 1조5000억 위안(약 225조 원)에 이른다.
한국도 서울 올림픽을 위해 2조3800여억 원을 들여 도시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올림픽 후 일시적 경기침체도 겪어=숨 가쁜 인프라 확충의 후유증으로 도쿄와 서울은 올림픽 후 1년 정도 경제성장이 둔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일본의 경우 1965년 올림픽 불황이란 말이 떠돌기도 했으나 그해 11월부터 고도성장을 시작해 1970년 7월까지 57개월간 경기확장기가 이어졌다. 이 기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1.5%에 이르렀고 근로자 급여는 79.2%가 늘었으며 개인소비는 연평균 9.6% 증가했다.
도쿄 올림픽을 앞둔 일본인의 꿈은 흑백 TV, 냉장고, 세탁기의 신종() 3기를 갖는 것이었지만, 올림픽을 거치고 난 뒤에는 이것이 3C로 바뀌었다. 컬러 TV, 쿨러(에어컨), 자동차가 그것.
올림픽 불황은 한국도 겪었다. 연간 실질경제성장률이 1988년 10.6%에서 이듬해는 6.7%로 떨어진 것. 그러나 1990년에는 다시 9%대로 회복됐다.
중국의 경우도 개혁개방 이후 30년간 보여 온 연평균 9.8%의 성장률이 둔화될 것이란 전망이 적지 않다. 중국 정부도 최근 양적 성장을 중시하는 여우콰이여우하오() 전략에서 질적 성장을 중시하는 여우하오여우콰이()로 전략을 바꿨다.
아시아의 부상=도쿄 올림픽이 패전의 상처를 딛고 부활한 일본이 국제사회로의 복귀를 알리는 상징적인 대회였다면 서울 올림픽은 한국의 민주화를 세계에 고했다. 베이징은 세계 중심에 우뚝 서는 국운 상승의 꿈을 꾸고 있다.
한국은 올림픽을 계기로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1990년 러시아와의 국교 수립, 1991년 유엔 가입, 1992년 중국과의 국교 수립 등 세계화를 본격적으로 추구했다. 서울 올림픽은 또 1980년 모스크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동서 한쪽의 보이콧으로 반쪽 올림픽이 된 데 비해 12년 만에 동서진영이 한자리에 모인 동서 화합의 올림픽이기도 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과 함께 일본에는 급격히 서양문화가 도입됐다.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는 1960년대 후반의 학원 분쟁 등으로 연결됐다.
중국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심화되는 양극화, 티베트 등 소수민족 문제나 언론 자유와 인권 문제 등에서의 잡음은 중국이 풀어야 할 과제다.
매너 교육부터는 3국 공통=올림픽은 국민통합의 장의 역할도 했다.
올림픽을 앞두고 3국은 시민 매너를 위한 대대적 캠페인을 벌였다. 줄을 서자, 자기 쓰레기는 자기가 가져가자는 1964년 도쿄에서 벌어진 캠페인이다. 한국에서도 1988년을 전후해 벌어진 공중도덕 캠페인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는 세계라는 관중 앞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일반 시민의 적극적 참여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공해는 2008년 베이징뿐 아니라 1964년 도쿄에서도 골칫거리였다.
중국 정부나 베이징 당국이 가장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인 것도 환경 대책이었다.
베이징 올림픽이 결정된 2001년부터 베이징 정부는 환경 인프라 정비에 약 42조 원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징 버스나 택시에 천연가스 연료가 도입됐고 연기를 뿜는 공장은 베이징 시내에서 상당수 사라졌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