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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남북정상선언, 거품 빼고 직시하자

Posted October. 05, 2007 06:37,   

정상회담 한두 번에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변화를 바라는 건 과욕이다. 더욱이 실질임기가 3개월도 안 남은 대통령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걸 수는 없다. 그럼에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어제 평양에서 서명한 104 공동선언 내용은 실망스럽고 걱정된다. 외견상 많은 합의를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 의미 있는 합의인지 의심스러울 뿐 아니라 빠지고 생략되거나 얼버무린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임기 마지막까지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보려는 노 대통령의 의지를 평가한다. 남북정상은 여건만 되면 자주 만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당장은 이번 공동선언의 허실()을 냉철히 따져보는 일이 중요하다. 그 과실()도, 부담도 대부분 우리 국민의 몫이기 때문이다.

공동선언에는 북한 핵문제가 제대로 언급되지 않았다. 국민의 간절한 여망과, 미국 일본 등 당사국들의 주문을 외면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정부 당국자는 두 정상이 공동선언 제4항에서 핵문제 해결을 위해 6자회담, 919 공동성명, 213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공동 노력키로 했다고 명시했기 때문에 핵 문제가 거론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핵은 6자회담에서 논의 중이므로 이 정도로 충분하다는 것인데 눈 가리고 아웅이다.

103 베이징 합의에서도 드러났듯이 북은 기존 핵무기와 핵물질 등을 연내 신고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핵 포기 의사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최소한 1992년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라도 재확인했어야 한다. 앞으로 한미공조 등 국제공조 과정에서 한국의 처지가 어렵게 됐다. 선언문에 북핵이라는 용어도 못 쓰고 한반도 핵문제라고 했으니 구차스럽다.

서해 북방한계선(NLL)도 양보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공동선언 제3항은 서해에서의 우발적 충돌을 막기 위해 공동어로수역을 지정하고 이 지역을 평화수역으로 만드는 방안을 국방장관회담에서 협의한다고 돼 있다. 협의한다고 하지만, 양보를 전제로 한 협의라는 인상이 짙다. 더욱이 5항에 명시된 민간선박의 해주 직항로 통과는 그 자체로 북한 선박이 NLL을 가로질러 항해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NLL 무력화()다.

NLL을 우발적 충돌 차원에서만 봐서는 곤란하다. 수도권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다. 공동어로수역도, 말처럼 남북이 사이좋게 어로작업을 하면 좋지만, 사소한 다툼이라도 벌어지면 순식간에 군사적 충돌로 번질 우려가 높다. 1976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안에서 일어난 미루나무 학살사건이 좋은 예다. 북한군과 미군이 공동으로 근무하다가 미루나무 가지치기로 충돌하는 바람에 미군이 북한군의 도끼에 맞아 죽고, 결국 미 항모()까지 출동했다. 남북 간에 공동은 아직 위험한 개념이다.

대북() 지원과 경협도 너무 일방적이다. 선언문에 명시된 경협사업의 90% 이상이 우리 측에서 비용을 대야 하는 것들이다. 해주와 주변 해역을 포괄한다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경제특구 건설, 안변과 남포의 조선협력단지 건설,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도로 개보수 등 하나같이 우리의 돈과 장비가 대대적으로 투입돼야 할 사업들이다.

이를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 번영을 위해서라고 공동선언 제5항에서 합리화했지만 그 돈은 결국 우리 국민의 세금에서 나간다. 이미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의 대북 지원액은 수조원에 달한다. 어제 정부가 내놓은 개성신의주간 철도 개보수와 개성평양간 고속도로 재포장 비용만도 7300억원으로 추산된다. 또 얼마를 더 쏟아 부어야 하나 라며 막막해 할 국민의 심정도 헤아려한다.

더 씁쓸한 것은 북의 수용 태도다. 고마워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고 오히려 우리 측을 데리고 논 듯한 인상마저 준다. 경의선(문산봉동)의 철도화물 수송 허용이 대표적인 예다. 이 철도는 원래 개통이 약속돼 있었으나 북 군부()의 반대로 연기됐던 것이다. 새삼 생색을 내는 것도 가소롭지만 왜 화물은 되고 사람은 안 되는가. 이유는 자명하다. 사람은 개방 바람을 몰고 오기 때문에 싫으니 개성공단에 필요한 화물만 실어 보내라는 것이다.

남측 기업들에 통 큰 투자와 기반시설 확충, 자원개발을 요구하면서도 그 전제가 돼야 할 통행 통신 통관의 3통()에 대해서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조속히 완비해 나가겠다는 말로 피해가고 있다. 역시 진정한 개방, 개혁에 대한 거부다. 이런 상황에서는 노 대통령이 강조한 경제지원-평화지원의 선순환 구조가 뿌리 내릴 수 없다. 북에 대한 경제지원과 협력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양보와 지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얻어낸 것은 별로 없다.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기 위해 3자 또는 4자 정상의 종전()선언을 추진한다는 제4항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 미국은 전제조건으로 북핵 완전 폐기를 요구하고 있다. 같은 정전협정(1953년) 당사국이지만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의 전략적 이익이 미국의 이익과 같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이런 합의를 명문화한 것 자체가 북측의 생색내기 성격이 짙다.

공동선언의 이행을 위해 남북총리급회담을 다음달 서울에서 갖기로 한 것도 마찬가지다. 기존 장관급회담에서도 충분히 논의할 수 있는 사안들을 총리급회담에서 다루기로 한 것은 우리 측의 편의를 봐준 듯 하다. 무슨 대단한 합의라도 한 듯이 총리급회담을 내세운 것도 우습지만, 대선 분위기가 고조돼 있을 다음달에 선거용으로 활용하라는 북의 배려처럼 보이는 것이다. 대선용이라면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더 효과적일 텐데 이 대목은 정상들이 수시로 만나 현안 문제들을 협의한다로 얼버무렸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실천과 신뢰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남북관계가 진정으로 본궤도에 오르려면 실천과 신뢰가 선()순환해야 한다. 실천되지 않는 합의는 불신의 골만 깊게 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수없이 그런 경험을 했다. 2000년 첫 정상회담 때도 615 공동선언을 놓고 당시 DJ 정권은 이제 전쟁은 끝났다며 환호했지만 2002년 서해교전이 일어났고, 북은 바로 1년 전 핵실험까지 했다.

노 대통령의 평양 체류 2박3일 간 김 위원장은 유별난 지도자임을 거듭 각인시켰다. 일정을 멋대로 바꿨고, 급기야는 체류를 하루 연장하라고 요구하는 결례까지 서슴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북의 체제선전극인 아리랑을 참관하고 기립박수까지 쳤다. 김 위원장의 장수()를 기원하며 건배를 제의하기도 했다. 두 정상의 이런 모습에서도 남북이 가야 할 길이 아직은 멀다는 것을 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