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아무리 높아도 넘을 수 있습니다.
김종훈(사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한국 측 협상단 수석대표의 목소리는 명쾌했다. 등산광()인 그는 협상이 어느 정도 진척이 됐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김 대표는 20일(현지 시간) 오후 8시 협상장인 미국 워싱턴 르네상스 메이플라워호텔 주변의 중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나 저녁 식사를 겸한 간담회를 열고 협상 진행상황과 전망, 각종 비판 여론에 대한 소회() 등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이제는 빅딜을 해야 하는 순간
고위급 협상은 어느 정도 진척 됐나.
이제 나올 게 다 나왔으니까 주고받기를 진짜로 해야 한다. 그동안 가정을 전제로 아이디어를 교환했다면 이제는 이거다 싶으면 실행에 옮겨야 한다.
지난해 6월 한미 FTA 1차 협상을 시작으로 10개월 동안 한국이 A를 준다면 미국에서 B를 달라는 식의 협상을 했다면 이제는 가정을 떼고 실제로 주고받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빅딜 대상은.
한국이 공세를 퍼붓는 자동차와 섬유의 관세 폐지안, 무역 구제 등과 미국이 공세를 취하는 농산물과 통신, 의약품 등 핵심 쟁점 10개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양국은 협상 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점을 감안해 하나를 주면 하나를 포기하는 단순한 딜이 아니라 핵심 쟁점을 하나의 패키지(묶음)로 엮어 서로 이익의 균형을 취하는 방식으로 일괄 타결을 모색하고 있다.
이번에 쟁점이 모두 타결되나.
한두 개 쟁점은 마지막까지 해결되지 않고 남을 수 있다. 시간을 끄는 쟁점들은 건설적인 모호성(constructive ambiguity)을 담아 처리할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산 인정 문제 등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부분은 나중에 논의한다는 방식이다.
딜 브레이커 1, 2개 남아
김 대표는 전반적인 협상 타결을 낙관하면서도 앞으로 큰 고개가 엄청 많이 남았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실제로 서울과 워싱턴에서 자동차, 농업, 섬유 등에 관해 고위급 회의가 열리고 있지만 뾰족한 방안을 찾지 못한 상태다.
협상이 부진한 원인은 무엇인가.
특히 농업은 협상 창구가 여러 개면 안 된다. 장관이 자꾸 나서면 곤란하다.
김 대표의 이런 발언은 최근 박흥수 농림부 장관이 농업 분야 개방에 반대한다는 발언을 여러 차례 한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섬유, 농업분야 협상이 특히 부진한데.
섬유와 농업 분야 협상은 현재 산업자원부와 농림부 차관이 따로 협상을 진행하고 있지만 통상장관급 회의가 중반에 접어들면 한꺼번에 다루겠다는 전략이다. 협상 진척 속도가 느린 것은 아니다. 그동안 가지치기의 과정이 있었으니 이 정도지 4차, 5차 협상이 끝날 때 정도였으면 밤을 새워도 타결하기 힘들 것이다.
포춘 쿠키의 덕담, 이젠 실행에 나서야
김 대표는 한미 FTA를 반대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반박했다.
정치권에서 한미 FTA는 마이너스 FTA이다라든가, FTA를 체결하려면 나를 밟고 가라는 등 반대하는 발언이 나오고 있는데 (그런 것이) 민주주의가 아니겠느냐.
한국이 너무 많이 내준다는 의견에 대해.
생각이 다르다. 미국이 훨씬 많이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옷을 겹겹이 껴입은 사람과 홑옷을 입은 사람을 비교할 때 같은 시간에 벗는 것은 비교할 수 없다. 한 예로 서비스 분야 협상에서 한국은 서비스 분야 개방 제외 목록(유보안)으로 90여 개를 올려 놓았지만 미국은 20개 안팎에 그쳤다.
미국 시장이 더 많이 개방돼 있어 한국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이는 국가는 개방이 덜 된 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얘기다.
식사가 끝나가자 테이블에는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포춘 쿠키가 후식으로 나왔다. 쿠키 안에는 덕담이 적혀 있다.
김 대표가 집어든 포춘 쿠키의 덕담은? 심심풀이지만 관심이 쏠렸다. 쿠키를 깨고 돌돌 말린 종이를 펴 보니 아이디어만 짜지 말고 이제 실행에 옮겨라는 문구가 나왔다.
한미 FTA 타결 시한이 열흘가량 남은 지금. 막바지 협상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김 대표의 표정에는 비장함마저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