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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한자에 새겨진 역사의 무늬

Posted November. 12, 2005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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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시대에 살아남은 마지막 상형()문자, 한자.

한자는 시대마다 색과 향이 다른 문화를 꽃피우며 수천 년 숙성을 거쳐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거북 뼈에 칼로 새겨 쓰던 원시 글자는 e-pen의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일찍이 백인문화의 우월성을 내세우며 문자 발전의 최하위 단계에 속하는 감각문자라고 한자를 깎아내린 것은 헤겔이었다. 그러나 이미지와 감성, 이미지와 텍스트의 조화가 강조되는 21세기에 한자의 매력은 더욱 도드라지고 있으니 이건 분명 문명사적 역전이 아닌가.

한자 하나하나의 내면에는 오랜 세월 중원과 한반도, 일본 열도를 넘나든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이 배어 있다. 동양인들의 삶, 그 삶의 날줄과 씨줄의 획으로 엮어놓은 역사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갑골문과 청동기 문자를 해독하며 그 속에 감추어진 동아시아 문화의 기원을 탐색해 온 저자. 그는 한자를 깊이 읽어야 할 이유를 이리 설명한다.

좋든 싫든 우리는 한자를 통해 빚어진 문화적 존재다. 한자는 동아시아 문화의 깊은 굴절 마디마디를 기억하고 있는 역사의 아이콘이다.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문화적 통찰과 새로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저자는 구석기시대의 그림문자에서 갑골문, 금문, 전서, 예서, 초서, 행서, 해서 그리고 간자체에 이르기까지 한자 서체의 변화를 더듬으며 문자와 인간의 발자국을 함께 훑는다.

초서와 행서의 시대를 들여다보자.

거대한 한나라가 중앙집권의 고삐를 놓치면서 들이닥친 위진남북조는 인디밴드 같았던 도가가 한순간 주류로 올라선 시기였다. 유연한 시대의 바람을 타고 한나라의 예서는 미적 감성을 듬뿍 담은 글꼴로 변신한다.

정치적이기만 했던 한자의 글꼴이 비로소 예술적 감성의 세례를 받았으니 예서의 필획에 자유의 날개를 달아 준 것은 왕희지였다.

그러나 한자의 글꼴은 송, 명대에 이르러 점차 생명을 잃어간다. 그리고 청 말기 혁명의 와중에 최대의 시련을 맞는다. 20세기 초 지식인들은 망국의 원흉으로 유교의 그릇인 한자를 지목했다. 너나없이 한자불멸, 중국필망(, )!을 외쳤다. 그러나 한자는 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중국인들은 깨달았다. 한자멸, 중국역멸(, )!

이 모순의 현장에서 절충을 시도한 게 마오쩌둥이다. 그는 한자의 몸 일부를 떼어내는 방법으로 한자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오늘날의 간자체다. 한자는 뜨거운 풀무 속에서 다시 한번 새로운 모습으로 벼려졌다.

영어가 판을 치는 세계의 한복판을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고 있는 한자. 이 끈질긴 생명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건 상형의 힘이라고 한다. 그게 뭘까? 그림의 힘이다. 이미지의 힘이다. 이미지란 설명을 넘어서 직관에 던지는 강속구다. 말하자면 오프라인의 모바일이랄까.

바야흐로 한자는 아이콘(이미지)과 텍스트가 합성된 새로운 의사소통 도구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지금 그 한자를 바라보며 한자가 숨기고 있는 깊은 이미지의 바다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고 있다.



이기우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