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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가슴에 묻어둔 아픈 기억들

Posted October. 22, 2005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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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기억] 김경학 외 4인 지음

625전쟁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정작 경험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소홀히 취급되어 왔다. 그동안 많은 연구가 주로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가는 책임 규명에 집중되어 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625전쟁은 건조한 기억 너머의 기록이 아니라 체험에 의한 기억이라는 형태로 여전히 우리 삶의 일부를 지배하는 숨쉬는 역사다. 전쟁이 일어난 지 반세기도 더 지났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나름대로의 기억들로 은밀한 이야기들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존재는 하지만 공식적으로 정리되기는 힘들었던 전쟁 체험자들의 기억들을 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가 주축이 돼 학문적 접근을 종횡으로 섞어 책을 펴냈다.

이미 2003년 1편 격인 전쟁과 사람들: 아래로부터의 한국전쟁 연구를 통해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을 국가나 집단에서 개인으로 끌어내려야 한다고 강조한 저자들이 이번에 구체적인 사례들을 중심으로 각론을 내놓은 것이다. 전쟁 중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 기억은 이후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가 연구자들의 치밀한 현장 취재로 복원되었다.

전쟁 나고 그런 시기에는 너무 똑똑하게 앞장서 말하고 다니면 피해를 보는 거여. 배웠더라도 조용히 있는 거여. 긍게(그러니까) 어려운 일이지. 배우고 했는디 어디에 가담 않고 있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이 말은 반세기도 넘은 기억의 언어이지만, 지금의 시점에서도 남다르게 들리지 않는다. 비록 총탄이 오가고 시체가 뒹굴지는 않지만 케케묵은 이념 대립 속에서 적과 아군으로 갈라져 있는 심리적 내전 상태를 너무 오래 겪고 있다는 피로감 탓일까.

구술이라는 생생한 언어로 듣는 전쟁의 기억들은 전쟁의 실체에 살과 피를 불어넣는다. 전쟁 때 이뤄진 집단 학살의 실체도 단순히 이념만이 아니라 집안 간 경쟁, 주변 사람들에게 인심을 얼마나 잃었느냐 얻었느냐 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함께 작용했던 것으로 증언된다.

원수라고 하면 가차운(가까운) 사람들하고 원수지, 멀리 있는 사람이 아녀. . 이웃 간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무서운 것이여. 세상이 어떤 혼란기에 들면 그것이 무서운 것이여. 긍게 이웃 간에 감정 없이 좋게 살아야 하는 거제. 또 다시 625전쟁 같은 난리가 나면 또 모르는 것이여.

알다시피, 기억은 주관적이다. 똑같은 상황을 겪었다 하더라도 나이 계층 성별에 따라 다르며 그것도 시간에 의해 윤색되고 가공된다는 것이 책을 통해 드러나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도 모호하다. 우연하고 돌발적인 죽음들도 때로 후대의 기억들에 의해 신비화되기도 한다. 책을 덮고 나면 625전쟁의 실체도 실체지만 과연 과거사의 실체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자신할 수 있는가 하는 묵직한 질문이 남는 것은 그 때문이다.



허문명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