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쌀 다음으로 익숙한 식량은 라면이다. 쌀이 수천년 동안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음식인 데 비해 라면은 불과 40년 만에 제2의 주식이 됐다. 지난해 국내에서 소비된 라면은 총 37억개로 국민 1인당 80개씩 먹은 셈이다. 이는 에베레스트산 8만3635개 높이에 해당하고, 면발을 이으면 지구 둘레를 4616바퀴나 돌 수 있는 양이다. 봉지면, 용기면, 생면 등으로 진화한 라면은 연간 매출액이 1조3000억원에 이르고 종류도 160여 가지나 된다. 스님들을 위해 마늘 실파 등 오신채()를 넣지 않은 라면도 있다.
라면 한 봉지는 보통 120g으로 520Cal 내외의 열량을 갖고 있다. 개당 75가닥의 면발로 되어 있고 총길이는 5060m에 이른다. 반죽을 눌러 빼는 중국 납면()의 일본식 발음인 라멘이 라면의 어원.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라면은 일본이 원조다. 1958년 안도 모모후쿠()가 튀김요리 과정을 관찰하던 중 라면제조법을 생각해냈다. 국내에 라면이 소개된 것은 1963년 9월 치킨 라면이 최초. 당시 가격은 10원으로 나면()으로 오인해 옷감인 줄 아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한 가지 재료가 이렇듯 다른 맛을 낼 수 있을까? 용기 물 불 첨가물 등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것이 라면의 맛이다. 군에 다녀온 남자들은 야간근무 후 반합에다 끓여 먹는 라면 맛을 으뜸으로 친다. 겨울에 조개탄을 태우는 난로 위에 양은 주전자를 올려놓고 그 안에서 끓여 내는 라면 맛 또한 기막히다. 그릇이 없을 때는 라면 봉지를 뒤집어 손바닥에 장갑처럼 끼워 라면을 먹기도 한다. 인터넷에는 수백 수천 가지의 라면 요리법과 30년가량 하루 세끼 라면만 먹고 산 사람 등 라면 마니아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지난 주말 서울에서 내외국인 9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라면 요리왕 선발대회에서 라면을 이용한 건강 3코스 요리를 선보인 한국조리과학고 2학년 곽호일군(17)이 대상을 차지했다. 첫 코스는 한약재와 인삼, 대추를 넣은 라면그라탱을 치즈와 김으로 싼 다음 닭 가슴살로 한 번 더 싸서 한입 크기로 만든 요리. 이어 라면샐러드를 붉은색과 노란색 라이스페이퍼로 싼 요리가 나왔고, 라면을 꿀에 버무려 땅콩 호두 아몬드를 묻힌 디저트로 마무리했다. 가히 라면 대장금다운 솜씨다. 장안의 인기 드라마 대장금의 무대인 조선조 중종 때 라면이 있었더라면 장금이와 한상궁은 과연 어떤 솜씨를 보였을까?
오 명 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