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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부자 괴롭히는 사회

Posted November. 14, 2003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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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대선자금을 둘러싼 정치권의 더러운 싸움과 돈벼락 논란 속에서 우리가 잠시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었던 것은 일평생 근검절약해서 모은 돈을 사회에 아낌없이 내놓은 어른들과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노인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고도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자취를 감춘 30대 초반의 젊은이 덕분이었다. 그런 이웃들이 있어 우리는 이 혼탁한 시대에서도 세상은 역시 살만한 곳이라고 자위하며 묵묵히 일터로 향하곤 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역시 좋은 일에는 마가 끼는 모양이다.

지난달 부산대에 현금 305억원을 기부한 데 이어 이달 초 1000억원의 사재를 추가 출연해 교육문화재단을 설립키로 한 부산의 송금조 태양 회장(79)이 기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카드 빚을 갚아 달라는 신용불량자에서부터 후원회 회장이 돼 달라는 정치지망생, 주식투자로 돈을 불려 반반씩 나누자는 증권사 직원, 각종 자선시민단체의 지원 요청이 쇄도한 것이다. 견디다 못한 송 회장이 집을 나와 병원 등에서 지내야 할 정도라니 그 고통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불가에서는 무주상보시()를 강조한다.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나눔이 으뜸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과도 통한다. 참된 기부자는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기를 원치 않는다. 하지만 막대한 기부를 받는 쪽에서야 그들의 귀한 뜻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하는 법. 그 또한 탓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때로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니 문제다. 자수성가한 기업인이 수백억원대의 부동산을 자선단체에 내놓았으나 언론보도 후 상속권자인 아들이 크게 반발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 것이 한 예다.

오랜 경제 불황에도 불구하고 국내 기부액수는 최근 몇 해 동안 150190%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연말연시에 모금액이 집중됐던 현상도 최근 들어 60%대로 완화됐다. 펜션 주인이 소년소녀 가장들을 위해 숙박권을 기부하고, 극장과 공연기획사들이 불우이웃에게 일정 비율의 공연 관람석을 제공하는 등 기부품목과 방식 또한 다양해지고 있다. 하지만 부유층의 참여는 여전히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고, 단 한번도 기부를 하지 않은 한국인도 43%나 된다. 기부 문화의 확산과 제도 정비 못지않게 기부자의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사회적 합의와 배려 또한 시급하다. 기부자를 괴롭히다니, 참으로 부끄러운 사회 아닌가.

오 명 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