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의 징비록을 읽어보면 조선은 참으로 한심한 나라였다. 대한해협에 전운이 깔렸는데도 국방을 소홀히 하다 왜군에 파죽지세로 밀린다. 정작 놀라운 것은 당시 지도층의 혼란상이다. 북상하는 왜군을 토벌하러 간 조선의 장군들은 적의 정세를 알려주는 농민의 목부터 베었다. 유언비어를 퍼뜨려 관군을 동요시킨다는 죄목이었다. 정작 왜군에 패퇴한 관군은 지나가는 의병을 몰살시켰다. 혼란을 틈타 반역을 도모한다는 죄였다.
이 정도면 분명 망해야 할 나라인데 조선은 결국 왜군을 몰아냈다.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까? 나라가 어려울 때 인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영의정까지 지낸 유성룡은 비 내린 진흙땅에 무릎을 꿇고 명나라 장수 이여송 앞에서 질책을 당한다. 군량미 조달이 늦어졌다는 이유에서다. 이러한 굴욕을 그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나라를 구하는 데 자신의 개인적 굴욕은 사사롭다고 생각한 것이다. 명나라 제독 진린은 마음에 안 드는 조선 관리의 목에 새끼를 매고 질질 끌고 다녔다. 진린이 조선함대와 합류하러 남으로 떠나자 조정은 바짝 긴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다른 면모를 발견한다. 진린을 극진히 대접하여 먼 바다까지 영접 나간 것은 물론이고 왜군 50명의 목을 진린에게 상납한다.
유성룡과 이순신 장군의 행동은 언뜻 보기에 비굴한 것 같지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숙인 높은 뜻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이와는 대조적인 인물이 있었다. 통신사의 부사로 1590년 일본에 간 김성일이다. 그는 철저히 자신을 내세워 가는 곳마다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귀국 후 황윤길과 달리 일본은 침략의도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가 가관이다. 반대 당파에 속하는 황윤길이 전쟁 위협을 너무 강조해 민심이 흉흉해질까봐 그랬다는 것이다. 나라의 안보보다는 자신이 속한 당파의 코드에 충실했던 인물 때문에 얼마 후 조선은 전화에 휘말린다.
앞의 대조적인 사례는 자기주장 내세우기와 코드 맞추기에 급급한 오늘날에도 교훈이 크다. 과거 민주화운동을 하다 나라를 다스리게 된 참여정부 인사는 과거보다는 미래로, 동지보다는 국민을 향해 눈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라면 때론 자신의 이념이나 체면은 뒤로 접을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자기와 생각이 같은 사람과 코드를 맞추고 그들과만 통치철학을 공유하려 들기보다는, 유성룡과 이순신 장군처럼 코드가 다른 상대와도 협력하고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안 세 영 객원 논설위원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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