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를 해주면 북한은 변할까. 과거 북한과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의 관계를 분석한 결과 그렇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 같은 결론은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핵 폐기와 대북 경제지원 및 안전보장을 맞바꾸는 접근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어서 관심을 끈다.
미국의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10일 미국 우드로 윌슨 센터가 각국 학자들로 구성된 연구팀에 의뢰해 실시한 연구 결과를 근거로 이같이 보도했다.
이 신문은 연구팀이 과거 공산권 국가들의 각종 기밀문서와 자료를 분석한 결과 북한은 소련이 붕괴한 뒤 끊어진 원조를 미국 한국 일본 등 과거 적대국을 상대로 받아내기 위해, 소련과 중국을 상대로 벌인 것과 유사한 방식의 게임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북한은 항상 원조를 얻어내기 위해 고도의 수완을 발휘했으며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에 수십년 동안 대규모 원조를 했지만 영향력은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을 제시했다. 다음은 모니터가 보도한 주요 사례이다.
소련은 북한에 60여개의 공장을 지어주고 상당한 무기와 원유, 곡물을 공급했다. 동독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도 북한에 공장을 지어주고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고위인사들을 데려다 치료해줬다.
그러나 북한은 전적으로 외부 지원에 의존했으며 심지어 80년대에도 의류조차 충분히 생산하지 못했다.
북한은 북한에 살고 있던 소련과 동유럽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괴롭혔지만 소련은 참았으며 많은 외교정책 목표에 대한 북한의 노골적인 반대도 묵인했다.
오히려 소련은 북한이 공산권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는 중국에 가세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양보했고, 북한은 김일성()의 행동을 통제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소련과 중국의 노력을 대부분 좌절시켰다.
북한과 소련의 관계는 1955년 북한이 농업 집단화 과정에서 곡물 수확량의 절반을 강제로 거둬들이지 못하도록 했다가 틀어졌다. 예상대로 기근이 발생하자 김일성은 소련에 간청해 식량을 지원받았지만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개혁을 하다가 몇 년 뒤 원래대로 돌아갔다.
소련은 남한에 공격적인 행동을 하면 지지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북한은 1968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기도했다. 북한은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중국의 압력 때문에 한국과 직접대화를 했지만 결국 적대정책으로 돌아갔다.
1994년 북한은 중국의 중재와 지원으로 제네바합의를 했지만 핵무기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함으로써 중국의 영향력도 일시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이 입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