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자유민주당의 제20대 총재로 선출된 고이즈미 준이치로()총리가 이끄는 새로운 내각이 출범했다.
고이즈미 총리 정권은 '자민당의 변화'를 바라는 당원과 '일본의 변화'를 요구하는 일본 국민의 기대 속에 등장한 정권이다.
선출되면 총리로 이어지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탈파벌()'을 내세운 고이즈미 후보가 최대 파벌을 이끌고 있는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를 누르고 승리하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선출을 일본 언론들은 '고이즈미 혁명' 또는 자민당의 '지각 변동'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물론 고이즈미 총리 체제의 탄생은 모리 요시로() 정권의 무능, 정치에 대한 국민의 총체적 불신과 장기적 경제 침체에 고이즈미 총리의 개인적 인기와 그의 이단성() 등이 복합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 정권의 등장은 '파벌 역학'이라는 자민당 특유의 정치 행태의 결과가 아니라, 개혁과 변화를 요구하는 당원과 국민의 폭넓은 지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꺼져 가던 정치 개혁의 불씨를 다시 지펴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탈파벌'이라는 자신의 선거 공약대로 자민당 당직 개편에서 최대 파벌인 하시모토파를 완전히 배제하고, 군소 파벌 출신들을 중용하는 '파격'을 선보이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 체제의 등장은 일본의 국가 진로의 향방에도 하나의 분기점을 이룰 것으로 전망된다. 전후 세대인 고이즈미 총리는 제국주의를 체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냉전적 국제 질서 속에서 경제발전에만 집착했던 과거의 지도자들과는 다른 여건과 상황에 놓여 있다. 전후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 속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그는 일본이 갖고 있는 잠재력과 능력을 바탕으로 국내 정치 및 경제 개혁을 이루면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고 평화를 위한 국제적 공헌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 수 있는 시점에 등장했다.
그러나 동시에 우려 섞인 전망도 가능하다. 고이즈미 총리는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이 저지른 일을 잘 알지 못하고, 패전의 아픔보다는 성장과 발전만을 기억하는 세대에 속한다. 이 때문에 민족적 우월감과 자신감, 그리고 폐쇄적 내셔널리즘을 바탕으로 다시 아시아에서 패권적 지위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국가의 침로()를 틀어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총재 취임 후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밝힌 자위대의 국군화를 위한 헌법의 조기 개정, 총리 자격으로 야스쿠니()신사 공식 참배, 역사교과서 수정에 대한 부정적 입장 등은 이런 우려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은 아시아 주변 국가들에 새로운 긴장과 불안을 야기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은 지도력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지난 10년 사이에 10명의 총리가 교체되는 단명 정권의 연속이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의 표현에 의하면 그 과정에서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의 '세 가지 버블이 붕괴됐으며' 유력지 아사히신문은 4월7일자에 '일본은 전후 최대의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다'고 걱정했다.
여기에 더하여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 사회는 이념적으로 복고적인 국가주의 전통으로 회귀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 체제가 여기에 편승한다면 주변 아시아 국가들과의 마찰은 불가피하고, 이는 일본은 물론 아시아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고이즈미 총리 정권의 등장을 계기로 일본은 지도력의 위기와 파벌 정치의 한계를 극복하고 경제 재도약으로 '일신'()해 '잃어버린 10년'을 보상받으면서, 동시에 아시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의 번영과 평화에 공헌하고 '믿을 수 있는 이웃'이라는 일본상을 구축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를 희망한다. 지난날 '특수한' 역사적 과거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왜곡 역사교과서 시정 문제와 재일동포의 참정권, 월드컵 공동 개최 등 해결해야 할 현안을 많이 안고 있는 우리는 일본의 변화를 주시하고, 대일 자세를 총체적으로 다시 한번 검토해야 할 것이다.
한상일(국민대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