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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조선 전쟁과 베트남 전쟁(

Posted March. 04, 2008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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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군도 기업도 베트남에 참전

최근, 한국에 베트남 요리점이 갑자기 많아졌다. 쌀로 만든 면에 콩나물을 듬뿍 넣은 포가 인기가 있다. 한국 정부에 의하면, 2006년 현재 한국인 남성과 베트남 여성의 결혼은 중국인 다음으로 많은 1만 100쌍 정도라고 한다. 전년에 비해 70 이상이나 늘어났다. 심각한 농어촌의 신부 부족 때문으로 보인다.

베트남의 호치민시 공항은 한국인 관광객으로 넘치고 있었다. 2007년 베트남을 방문한 한국인은 43만 명 이상으로, 중국 다음 가는 수이다. 한국과 베트남은 유교의 영향을 받아, 연장자를 존경하며 가족 간의 유대가 강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과 베트남을 묶는 것은 그 뿐만이 아니다.

베트남 전쟁이다.

한국은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을 했다. 1964년부터 73년까지 베트남 중부를 중심으로 약 32만 명을 파병하였다. 의료 부대를 시작으로 맹호, 백마, 청룡이라는 용맹한 정예 부대를 계속해서 투입하였다. 그 규모는 주역인 미국 다음이다. 병사 외에도, 군 관계 일로 베트남으로 일하러 가 고향에 훌륭한 집을 마련한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서울에 있는 전쟁 기념관은 제복 차림의 군인들로 떠들썩했다. 그 곳에서는 베트남 파병에 대해 공산 침략자와 싸우는 자유 베트남을 지원한 것은, 집단 안보를 위한 국토방위 정책의 일환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동굴에 잠복하고 있는 베트콩(남베트남 해방 민족 전선)을 어떻게 소탕했는지, 알기 쉽게 그림을 넣어 자랑스럽게 전시하고 있었다.

베트콩은 미국 병사와는 싸웠지만, 한국 병사를 보면 무서워서 도망쳤다고 고교생을 인솔하는 한 교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명분은 미국에 은혜를 갚는 것이고 / 실리는 경제적 목적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어 자국의 안전 보장과는 무관한 전쟁에 어째서 32만 명이나 되는 군사를 파병했을까.

베트남전 참전이 한국 경제에 가져온 영향을 연구하고 있는 시즈오카 대학의 박근호() 교수(45)는 미국의 외교 문서를 자세히 조사한 결과, 한국의 파병은 대의명분과 실리가 결합된 것이다고 결론지었다. 대의명분이란, 한국 전쟁에서 미국이 한국 측과 함께 싸워 준 은혜에 보답한다는 것이다.

그럼, 실리란 무엇인가.

당시,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는 험프리 부통령에게, 한국의 파병은일석삼조 그리고 플러스알파의 효과를 가져 온다고 보고했다. 삼조란, 한국의 경제발전과 한미 관계의 강화, 그리고 한국군의 전투 능력 향상이다.

1961년 5월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후의 대통령)은 11월에 미국을 방문하여, 케네디 대통령에게 베트남전의 파병 의향을 비쳤다. 미국의 환심을 사서 군사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파병은 존슨이 대통령이 되고 난 후였다. 1964년 9월에 먼저, 의료 부대와 태권도 교관을 베트남으로 보냈다.

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각료들은 일본이 한국 전쟁으로 인한 경제 특수로 전후 부흥에 성공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국도 베트남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미국으로부터의 특수에 의해 경제발전을 이루려고 했었다라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의 원조가 줄어들었고, 외화 부족도 심각했다. 심해져가는 곤에서 탈출하는 방법으로 베트남전 참전에 의한 미국으로부터의 특수 및 원조와, 1965년에 실현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따른 경제협력 자금을 도입하고자 했다.

박 교수에 의하면, 한국은 1965년부터 72년까지 미국으로부터 베트남 특수에 의해서 풍부한 자금을 확보하였다. 총액은 10억 2200만 달러에 달한다. 그 중 72%가 노동자와 군인들의 송금, 그리고 도로 건설, 준설 공사, 수송 등으로, 무역 외의 일이었다. 한국은 팔 수 있는 물건이 없었으므로 노동력을 제공 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박 교수는 말한다. 현대, 한진, 대우, 삼성. 훗날 대재벌이 된 기업들은 베트남 특수로 발전의 기초를 쌓아 올렸다. 베트남행 버스를 놓치지 말라는 유행어가 생겨서, 병사도 노동자도 기업도 전쟁터로 향했다.

베트남 전쟁은,1975년 사이공 함락으로 막을 내렸다. 박 대통령은 그 후 4년 뒤에 암살되었지만, 이후에도 전두환, 노태우와 같은 군인 출신들의 대통령이 등장했다. 게다가 이 두 대통령 모두가 베트남전에서 지휘관으로 활약했었다. 전쟁의 불이익을 공공연하게 말하는 사람은 그 시절에는 감옥행을 각오해야만 했다.

한국에 의한 학살 / 민주화 진전 속에서 밝혀졌다

999년, 한국의 베트남 전쟁관을 뒤흔든 사건이 있었다.

주요 주간지인 한겨레 21에서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노인과 아이, 여성들을 숱하게 죽였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기사를 쓴 사람은 베트남에 유학중이었던 역사를 전공하는 대학원생 구수정()(41)이었다. 한국은 1992년 베트남과 국교를 정상화하였고, 구 씨는 그 다음 에 유학을 갔다. 1997년 말에는 오랜 세월 군사 정권에 의해서 탄압을 받았던 김대중 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었다.

호치민시에서 지금도 사건 조사를 계속하고 있는 구 씨를 만났다. 계기는 한국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조사한 베트남 당국의 내부 문서를 입수한 것이라고 한다. 임산부와 아이를 죽였다는 내용에 놀랐다. 살아남은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문서의 내용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구 씨는 자신이 듣고 조사한 내용을 근거로, 학살 피해가 적어도 9천명에 달한다고 보고 있다.

일찍이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던 빈딘성의 타이빈 마을에는 집오리나 닭들이 샛길을 걸어 다니고, 논에서는 물소가 놀고 있었다.

이 상처를 보세요라며, 구엔 톤 롱 씨(56)는 갑자기 바지를 벗어 다리의 상처를 보여 주었다. 수류탄 파편이 몸속에 남아있다고 했다. 아픔을 견딜 수 없을 때는 술을 마신다며, 이 날도 얼굴에 술기운이 돌고 있었다.

사건은 1966년 2월에 일어났다. 아침 9 시가 지났을 무렵, 마을에 들어 온 한국 병사들이 마을 사람 68명을 한 군데에 모아 놓고 엎드리라고 했다. 일제히 총격을 가하고, 수류탄을 터뜨렸다. 열두 살이었던 여동생 폰 씨는 머리를 맞았고 어머니는 한순간에 양 다리를 잃었다. 거기까지 말을 하고 롱 씨는 눈이 새빨개져서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죽기 직전에 살려 달라고 외쳤다. 나도 다리에 파편을 맞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어서 죄송했다. 마을에서 살아남은 이는 롱 씨를 포함해서 3명뿐이었다.

희생자의 이름을 새긴 위령비 옆에 벽화가 걸려 있었다. 호랑이 마크를 붙인 맹호 부대 병사가, 수류탄을 손에 들고 마을 사람을 몰아 부치고 있었다. 집이 불타고 울부짖는 주민들의 벽화를 가리키며, 롱 씨는 박정희 군은 정말로 무서웠다고 했다.

베트남에서는 학살 사건이 있었던 성()박물관에서 실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생후 몇 개월 밖에 안 된 아이와 노인이 살해당했어요. 갓난아기와 노인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까. 저항할 수 없습니다. 정말로 심했어요. 후이엔성 조사 책임자, 구엔 티 킴호아 부관장(47)이 학살 장소와 희생자 수를 정리한 보고서를 읽어 주었다. 성 내 33곳에서 679명의 희생자를 확인했다고 한다.

왜, 무장도 하지 않은 사람들을 죽였을까.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조선 전쟁(한국 전쟁)과의 관련을 지적한다. 병사들은 한국 전쟁을 체험해서 공산주의자는 인간이 아니라고 여겼지요. 죽여야만 한다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서 빨갱이 사냥이라는 심리적 준비가 된 상태였습니다.

한국에서는 구 씨의 기사를 본 많은 시민들이 움직였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사람도 많았다. 한겨레 21에서 고발 캠페인을 진행한 고경태() 기자(40)는 우리는 일본 식민지 지배의 피해자였다. 베트남 전쟁에서도 병사들이 고엽제로 피해를 받는 등, 어디까지나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학살 사실이 밝혀졌고, 가해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했다.

독자들의 모금으로 베트남에 평화위령 공원을 지었다. 한국의 시민 단체가 위령비를 세우고, 피해자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하기도 하고 집을 수리해 주었다. 한국인 의사가 자원봉사로 마을 사람들을 진찰하고, 젊은이가 현지에서 캠프를 하며 역사를 배우고 있다. 시민들에 의한 사죄와 화해 행동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영향을 받은 한국 정부도 학교와 병원 건설에 원조를 하고 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은 하노이를 방문하여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한 때, 불행한 시기가 있었던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이 말에 대해, 베트남의 판 반 카이 수상은 과거의 일은 매듭을 짓고, 미래를 응시하자라고 말할 따름이었다. 공산당 독재 하에서, 도이모이(Doi Moi 쇄신)라고 불리는 개혁 개방 정책으로 경제 발전을 추진하는 베트남으로서는 한국은 중요한 파트너다. 수상의 발언은 그러한 배려가 보이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한국군은 학살에 대해서 제대로 된 진상 조사를 하지 않았다. 포괄적인 과거 청산을 내세운 노무현 정부는 군사 정권에 의한 인권 침해 조사 등을 진행시켜 왔지만, 아직 이 문제에 대해서는 손대지 못 하고 있다.

한편, 파병 부대 병사들은 미군이 고엽제를 뿌린 지역에서 싸워, 10만 명 이상이 후유증으로 보이는 병을 앓고 있다. 가혹한 경험 때문에 정신이 병들어 버린 사람도 있다.

서울 시내에 사는 김태근() 씨(62)는 1965년부터 2년 간, 맹호 부대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다. 귀국한 지 얼마 안 돼, 머리가 아파서 의식을 잃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일을 할 수도 없었다. 고엽제의 영향으로 왼발이 가늘어지고, 마비가 되어 걸을 수도 없다. 나라를 위한 전쟁 수행이었는데, 이런 몸이 되어 버렸다. 치료법이 없는 것이 괴롭다고 말한다. 곁에서 한결같이 보살펴 준 아내도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나라로부터 얼마 안 되는 상해 수당을 받으며 혼자 생활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은 지금까지도, 한국 사람들에게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사쿠라이 이즈미(桜)

베트남 전쟁이 일어난 냉전시대에 일본은 소련, 한국, 중국과 국교 정상화를 완수한다. 다음에는 이 테마를.

여러 나라가 파병

베트남 전쟁은 냉전 하에서 많은 나라들이 얽힌 국제적인 전쟁이었다. 사회주의를 내건 북베트남에는 중국이 방공() 작전 부대와 도로 건설 부대 등을 보냈고, 구 소련도 군사 고문 등을 파견했다, 북한도 공군 조종사를 파견하였다.

미국은 동남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확대를 막기 위해, 1954년 군사 동맹인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SEATO)를 결성했다. 남베트남에는 미국과 한국을 위시해, 대만, 스페인, SEATO 가맹국인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타이 등도 파병을 했다.

일본은 전투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미국의 요청도 있어 남베트남에 경제 원조를 실시했다. 1972년까지 미국의 점령 하에 놓였던 오키나와 기지에서는 미군이 베트남으로 출격했다. 미일 안보 체제 아래에서 일본의 요코스카(横)와 사세보(), 그리고 본토의 미군 기지도 보급과 수리 등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베트남에서 부상을 당한 미국 병사는 일본에서 치료를 받았다.

1960년대 후반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반전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일본에서도 작가인 오다 미노 마코토(実) 씨 등이 1965년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 연합(베헤렌)이란 단체를 결성해 반전 운동을 이끌어 갔다.

:베트남 전쟁:

제 2차 대전 후, 예전의 종주국 프랑스는 다시 한 번 베트남의 식민지화를 기도하며 군을 파견했지만, 1954년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배하여 철수했다. 제네바 협정에 의해서 북위 17도가 잠정 군사 경계선으로 정해졌다. 북부는 호치민 주석이 지도하는 사회주의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이 되었고, 남쪽에서는 자본주의를 따르는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지배하게 되어 대립하였다. 남부에서는 1960년 남베트남 해방 민족 전선이 결성되어,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아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여 미군과 남베트남군과 싸웠다. 미국은 미소 냉전 하에서 북베트남의 세력이 커지면 세계적으로 공산주의가 확대된다는 도미노 이론을 근거로, 1962년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 원조 사령부를 현지에 설치하고 공공연하게 개입을 시작하였다. 1964년 미군 함정이 공해 상에서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았다는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였다. 존슨 대통령은 1965년, 북베트남을 직접 공격하면서 본격적으로 해병대도 상륙시켰다. 그러나 부패와 독재로 인해, 민중의 지지를 잃은 남베트남 정권은 해방 전선의 공격을 억제하지도 못했다. 전비가 확대되고 인명 피해를 내면서, 세계적인 반전 운동에 부딪힌 미국은 철수를 결의했다. 1973년 1월, 남북베트남과 미국, 남베트남 임시 혁명 정부가 모여 파리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북베트남과 해방 전선은 공세를 강화하였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현 호치민시)이 함락되면서 남베트남 정권은 붕괴되고 전쟁이 끝났다. 다음 해에는 남북통일 선거를 실시해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했다.

미국은 전사자 5만8천 명, 전상자가 30만 명에 달했다. 베트남 측의 전사자는 백 수십만이라고도 200만 명 이상이라고도 한다.

:박정희(1917-79):

한국군인 출신 대통령. 만주 군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배우고 관동군에 배속되었다. 한국 정부 수립 후에는 한국 육군 소장이 되었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주도하여 국가 권력을 잡았다.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 대통령 권한 대행을 거쳐 1963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했다. 재임 중에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었지만, 재벌과 유착하였고 부패를 낳았다. 3선을 금지한다는 헌법을 개정하는 등, 독재 체제를 강화하고 정치적 적들과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다. 1979년 10월 26일, 연회 자리에서 측근인 김재규 중앙 정보부(KCIA) 부장에 의해서 사살되었다.

조선 전쟁(한국 전쟁)과 영화

반공으로부터의 탈출

한국 영화는 조선 전쟁(한국 전쟁)과 남북 분단을 지속적으로 그려 왔다. 최근 일본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한류작품들은 민족의 비극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다가가고 있다.

검열 폐지로 다양해진 표현 방법

1990년대 말 한국 영화는 크게 변화했다.

그 변화는 2000년경부터 잇달아 등장한 조선 전쟁과 남북 분단에 관한 대작에서 엿 볼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를 방불케 하는 빠른 템포로 전개되는 격동적인 스토리와 박진감 넘치는 액션, 그리고 큰 스케일.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쟁과 분단을 표현하는 방법이 새로워졌다.

강제규() 감독은 국내외에 새로운 시대 한국 영화의 힘을 알린 쉬리(1999년)와 태극기 휘날리며(2004년)를 통해 남북 분단을 정면에서 다루었다. 강 감독은 이번 취재에서 영화의 의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예전의 한국 영화는 한국 전쟁이나 분단을 다룰 때 반공이라는 고정 관념에서 그렸다. 나는 거기서 탈출을 하고 싶었다.

예를 들자면 쉬리는 한국의 정보 기관원과 완벽하게 서울 시민으로 탈바꿈한 북한 공작원과의 연애가 스토리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말하자면, 북한 측의 인물을 인간으로서 그렸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찬욱() 감독의 JSA(2000년)도 남북 병사의 교류가 테마다.

조선 전쟁과 남북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는 1950년대 후반부터 많이 만들어져 왔다. 그러나 구도는 한결 같았다. 남쪽은 정의롭고 북쪽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었다. 즉 군사 정권 하의 국책이었던 반공이 관철되어 왔던 것이다.

1960년대부터 만들어진 영화법은 그때까지도 존재했던 검열을 한층 강화시켰고, 영화인의 손발을 묶었다. 이 시대에는 반공법도 있어 북한을 호의적으로 그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쁘게 그리지 않으면 용공혐의를 받기도 했다. 한편, 반공 영화를 만든 영화사에는 보너스가 주어지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규제가 한층 더 강화되어 영화계에 있어서는 어두운 시대가 이어졌다.

한국 영화 진흥 위원장인 안정숙() 씨는 오랜 세월 기자로서 영화계를 취재해 왔다.

엄한 검열이 영화의 매력을 빼앗아 버렸고, 도식화된 반공 영화를 관객들은 외면했습니다. 김대중 정부에서부터 검열이 폐지되어, 억압되어 온 다양한 소재들이 영화로 분출된 것입니다.

영화의 변화는 민주화와 함께 찾아 왔다. 김대중 정부는 영화 산업 육성에 나섰다. 당시 30대로, 1980년대에 학생으로서 민주화 운동에 참가한 1960년대 태생의 386세대가 영화계에 대두했다.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 감독과, JSA의 박 감독도 이 세대다.

한국 영화를 잘 아는 도쿄 국제영화제의 연출자 이시자카 켄지() 씨는 단순한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한국의 현대사를 다시 읽고, 그들 나름대로 재구축 하고자 하는 의지가 보인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면, 태극기 휘날리며는 언급하기조차 어려웠던 조선 전쟁 중 한국 정부에 의해서 살해된 주민 학살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최근의 작품들은 북한을 적으로 단순화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공유하는 같은 민족으로서 그리기 시작했다. 또한, 이데올로기로 뭉쳐진 국가의 관점에서, 누구라도 경험하는 연애와 우정 등을 줄거리의 축으로 한, 개인이란 관점으로 변화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도 있다. 즉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세대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내용을 작품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2005년에 한국에서 히트를 친, 웰컴 투 동막골은 조선 전쟁 중에 남북한의 병사와 유엔군의 한 일원인 미군 병사가 평화로운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우정을 키워나가는 판타지 작품이다.

박광현() 감독은 한국 전쟁을 그린 것은 아닙니다. 전쟁이라는 상황의 특수성을 그리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어디까지나 무대의 배경으로 한국 전쟁을 가져 온 것이라고 한다. 반전 영화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비극이 아니라 희망으로 끝나는 작품을 말입니다.

그러나 영화 공개 후, 관객뿐만이 아니라 일부 미디어에서도 반미친북이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작년 말, 영화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 예술원 회장이 된 김수용() 감독은 109 편의 작품을 찍은 대 베테랑 감독이다. 영화계의 어두운 시대를 살아 왔다. 검열로 필름을 몇 번이나 잘렸다. 반공 영화도 3개 만들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탄생과 함께 자신을 괴롭힌 검열 기관의 후신인 영상물 등급 위원회의 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6년 동안의 재임 기간 중 심사한 작품에는 태극기 휘날리며와 JSA가 있었다. 퇴임 후에는 웰컴 투 동막골을 보면서 아! 라고 무릎을 쳤다고 한다.

형제가 자유롭게 남북을 오가는 것은 거의 만화지요. 확대 해석하면 얼마든지 비판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세계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현실로서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영화라는 것은 상상의 예술입니다. 그 상상과 표현이 자유로워진 지금, 감독들의 폭 넓은 상상의 세계를 즐겨야 하겠지요.

니시 마사유키

거장 임권택 감독의 마음 속 그 시대를 냉정하게 그렸었는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거장, 임권택() 감독(71)은 서편제등 한국의 전통과 풍경을 아름답게 그린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예전에는 조선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많이 만들었다. 어떠한 심정으로 영화를 만들었을까. 임 감독에게 물어 봤다.

좌익과 우익의 항쟁, 그리고 조선 전쟁이라는 혼란기 속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1962년에 감독으로 데뷔해, 초기에 전쟁 영화를 몇 작품 만들면서, 1973년에는 군이 전면적으로 협력한 국책 전쟁 영화 증언의 감독으로 지명되었다.

명예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뒷일을 생각하니 거절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가족 중에는 좌익 활동을 한 사람도 있어 당시는 연좌제가 있었기 때문에 국가에서 보자면 나는 환영할 만한 존재가 못 되었다. 그러나 대규모의 전쟁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사람이 당시에는 나 외에 없었다.

소년 시대에 경험한 사상 대립이나 전쟁이 초래한 비극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는 검열의 시대였던 것이다.

자신의 생각대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항상 검열관의 눈으로 내 자신을 속박해 왔다. 그런 날 들이 박정희 정권부터 노태우 정권까지 이어졌다.

민주화가 진전된 1994년, 자신의 조선 전쟁관을 대작 태백산맥에 담았다.

어떠한 이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희생 위에 실현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국 전쟁은 민족의 희생만을 남겼다.

평가는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데올로기에 편중되지 않은 작품이라 어느 세력으로 부터도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 후, 조선 전쟁에 관한 영화는 만들지 않고 있다.

우리 세대는 전쟁과 분단에 의한 후유증을 지금도 안고 있다. 정말로 그 시대를 냉정하게 그려온 것 일까. 나는 이제 전쟁의 그 시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상처가 없는 세대들의 영화에 기대를 건다.

1936년 전라남도 장성 출생. 2002년 취화선으로 칸느 국제영화제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작년에 공개된 천년학이 통산 100번째 작품이다.

:영화법과 검열:

한국의 영화 제작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시작되어, 조선 총독부의 통제와 검열을 받았다. 해방 후에는 조선 전쟁의 혼란기 등을 거쳐서, 1962년에 사전 신고•상영 허가 제도를 포함한 영화법이 제정되었다. 이 영화법은 1986년까지 여섯 번 개정되었으며, 1966년 개정에서는 시나리오도 포함한 사전 검열 제도가 도입되었다.

체제 유지를 위해 문화, 예술 활동을 규제하고자 한 박정희 정권 시대인 1973년에는 4차 개정이 있었고 검열은 한층 더 엄격해 졌다. 이후, 영화에 있어서 1970년대는 가장 어두운 시대라고 다들 입을 모은다. 전두환 정권 하의 1984년 5차 개정에서는 검열 제도를 폐지하고 사전 심의제를 도입했지만, 사실상 사전 검열이었다. 1996년, 헌법재판소가 사전 심의제를 위헌으로 판단하여, 검열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지식인 20 명에 듣는다--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 대 사건은? (16

모우리 가즈코() 와세다대(稲) 정경학술원 교수

신중국의 의의, 아직까지도 확정되지 않은 채로

동아시아의 근대는 서양의 충격으로 시작된다. 아편 전쟁으로 인한 청왕조의 쇠퇴와 근대 중국으로의 고난의 길이 시작되었으며, 일본은 개국과 대정봉환()으로 대응했다. 메이지 유신은 이러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근대화의 선두에 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야망을 펼치고자 한 것인지를, 다시 연구해 볼 점이 많다.

청일 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는 일본에 의한 중화 제국의 재편성으로 크게 바뀌었다. 리훙장()의 외교가 대만을 할양한 것은 중일 전쟁을 향한 복선이 되었고, 오늘날 까지 이어지는 분단 중국의 근원이 되었다. 청일 전쟁은 이 점에서 특히 현대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1905년 제2차 한일 협약과, 1910년의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소멸하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창씨개명이 상징하는 것처럼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으로도 특이한 식민지라고 볼 수 있다. 근대 일본에서의 조선인에 대한 멸시와 조선에 대한 지배는 왜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구조와 내용이었는지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

1931년 관동군에 의한 만주 사변으로 시작해, 일본은 루거우차오() 사건을 거쳐 중국과 전면 전쟁에 들어간다. 일본의 화북() 침략은 중국을 항일 내셔널리즘 일색으로 뭉치게 했고 결국, 일본은 방대한 사람과 자원을 소모해 참패했다. 이 전쟁과 그에 대한 평가로 일본과 중국은 지금까지도 역사 인식을 둘러싸고 뿌리 깊은 대립을 계속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군사 작전이 수렁에 빠진 일본은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개전을 하였고, 전쟁 자원 획득을 위해 동남아시아로의 침공도 감행했다. 미영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1942년 중반부터 전황은 악화일로를 달렸지만, 일본의 지도부는 옥쇄( 명예롭게 죽음을 선택함)을 선택했다. 전쟁 돌입은 합리성이 있었는지, 어디서 멈추어야 했는지, 최종 책임은 누가 져야하는지는, 확실히 해야 할 과제라 하겠다.

유럽에서의 냉전시대의 시작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중화인민 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태어났다. 1950년 발발한 조선 전쟁(한국 전쟁)과 중국의 참전이 동아시아의 분단 구조를 결정지었으며, 이 상황은 1972년 미국과 중국이 접근해서 일중 국교가 정상화되기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중국에 도대체 무엇을 남겼는가. 마오쩌둥()의 옳고 그른 유산에 대해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인민 중국 성립의 의의는 아직 확정지을 수 없다.

패전 후, 일본은 점령군에 의해 민주화가 진행되었고 평화 헌법도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식된 면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전쟁 전부터 있었던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같은 기초가 이식 민주주의를 뿌리 내리게 한 것이고,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참상은 일본 국민에게 평화주의를 가져다주었다. 민주주의와 평화, 경제 성장은 전쟁 기간에 대한 일본식의 자기 부정과 자기비판이다. 그리고 이는 전후 동아시아의 발전 모델이 되었고, 큰 자산이 된 시실은 부정할 수 없다.

분단된 조선반도(한반도) 남부에서는 군사 정권을 거쳐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시작되었다. 배경에는 중간 계층의 출현과 군사 독재를 용인하지 않는 국제 환경이 있었다. 민주제도가 정착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국의 민주화는 대만의 민주화와 함께 동아시아의 정치 체제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중국은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으로 크게 세계에서 뒤쳐졌다. 마오쩌둥()이 사라지고 장칭()등의 [4인조]가 실각한 후, 1978년 덩샤오핑() 의 등장과 함께 경제 발전으로 향한다. 4 개의 근대화와 GDP 4 배 증가 계획이다. 경제의 탈사회주의화와 외자와 기술을 도입하는 개방 정책을 시행했다. 특히, 1992년 덩샤오핑()이 지시한 시장화의 가속으로 중국 경제는 경이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것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대국 중국이 세계의 질서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 지가, 앞으로의 세계의 중대한 관심사이다.

인터뷰후쿠다 히로키()

약력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정치와 국제 관계를 연구. 문부 과학성 21 세기 COE 현대 아시아학의 창생리더이다. 저서에는 신판 현대 중국 정치일중 관계등이 있다.

리스트

아편 전쟁

메이지 유신

청일 전쟁•대만 할양

일본의 한국 병합

만주 사변으로부터 중일 15년 전쟁

태평양 전쟁과 일본의 패배

중화인민 공화국의 성립과 아시아의 냉전

일본의 민주화와 고도 성장

한국 민주화 운동

중국의 4 개의 근대화

*시대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