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거의 3타석 2안타꼴로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를 배출한다. 1990년 이래 지금까지 12차례 미국인 수상자가 나왔다. 이 때문에 미국 사회는 수상자의 국적보다는 어떤 업적이 인정받았는지에 주로 관심을 쏟아왔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다르다.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자로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유타대의 마리오 카페키(70사진) 교수가 8일 선정되자 미국 사회는 흥분된 분위기다.
21세기 첨단 과학의 핵심 분야인 유전자 질환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그의 인생 역정에는 20세기의 어두운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미국 언론들은 과거에도 can do(할 수 있다) 정신을 실현한 성공 스토리로 카페키 교수의 인생 역정을 자주 조명해 왔다.
카페키 교수는 1937년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20세기 초 예술가의 꿈을 안고 유럽으로 건너 온 미국 여성의 딸이었다. 나치와 파시즘에 저항하던 보헤미안 예술가들과 교유하던 어머니는 이탈리아 공군 장교를 만나 카페키 교수를 낳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혼은 하지 않았고 곧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아버지는 전투 중 사망했고, 어머니는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게슈타포에 끌려갈 것을 예감한 어머니는 전 재산을 팔아 시골에서 농사짓는 친구에게 건네주며 아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카페키 교수가 4세 때의 일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친구는 남은 돈이 없다며 그를 쫓아냈다.
이때부터 4년 반 동안 어린 소년은 부랑아로 지내야 했다. 거리에서 자고 쓰레기통을 뒤져 끼니를 때웠다. 굶어죽기 직전까지 간 적도 많았다.
3년 반가량 거리를 헤매던 그는 영양실조에 걸린 부랑아들을 수용하는 시설에 감금됐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1년 내내 발가벗은 채 지내게 하는 시설이었지만 매일 작은 빵 한 조각과 커피가 나왔다.
나치의 패망으로 수용소에서 나온 어머니는 1년 동안 그를 찾아 헤맨 끝에 9번째 생일날 아들을 찾아냈다. 모자는 곧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사는 외삼촌을 찾아 대서양을 건넜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전혀 달랐다. 퀘이커 교도 공동체를 이끌던 삼촌의 도움으로 퀘이커학교에 들어간 그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지만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찰흙을 만들게 해 주는 교사의 배려로 배우는 즐거움을 터득했다.
어린 시절 경험한 생존투쟁의 영향일까. 카페키 교수는 남다른 끈기와 인내심을 갖고 연구를 수행했다.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밝혀낸 제임스 웟슨의 지도 아래 1967년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딴 그는 1980년 유전자 적중(gene targeting세포핵에 DNA를 주입해 특정 유전자의 변형을 일으키는 기술)이란 생소한 연구 프로젝트를 내놓으며 미국 국립보건원(NIH)에 지원을 신청했다. 그러나 NIH는 쓸모없는 연구라며 퇴짜를 놓았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연구를 계속했고 4년 후 NIH는 우리가 한 말을 듣지 않아 줘 정말 고맙다고 사과하는 편지를 보내며 그의 연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현재 유전자 적중 기술은 의학사에 한 획을 그은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카페키 교수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성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인간은 인위적으로 통제하고 조작할 수 없는 존재라고만 대답한다.
이기홍 sechepa@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