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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바다 목장

Posted November. 12, 2016 07:11   

Updated November. 12, 2016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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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가 민주당 앨 고어에게 신승(辛勝)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의 정권 교체가 한반도에 미칠 파장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했다. 부시도 전임자인 빌 클린턴처럼 ‘햇볕정책’을 지지하도록 설득할 생각에 정상회담을 서둘렀다. 부시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인지 거의 알지 못한 채.

 2001년 1월 25일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전화를 걸어 왔을 때 김 대통령은 대북 포용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시는 전화기 아랫부분을 손으로 가린 채 곁에 있던 찰스 프리처드 아시아 담당 보좌관에게 물었다. “이 친구 누구야?(Who is this guy?) 이렇게 순진하다니 믿을 수 없군.” 프리처드가 회고록 등에서 밝힌 비화다.

 더 큰 재앙은 3월 8일 워싱턴에서 열린 첫 정상회담이었다. 공동 기자회견에서 부시 대통령은 “나는 북한 지도자에게 의구심을 갖고 있다”며 깊은 불신을 드러냈고 김 대통령의 답변을 가로채기도 했다. 김 대통령을 ‘This man’이라고 부른 것은 외교적 결례 논란을 촉발했다. 우리말로 ‘이 양반’ 정도의 표현을 부시가 의도적으로 한 것인지 말들이 많았다. 김 대통령은 후일 자서전에서 “친근감을 표시했다고 하나 매우 불쾌했다. … 평소에 나이를 따지지 않지만 그 말을 들으니 그가 아들뻘이란 생각도 들었다”고 술회했다.

 뉴욕타임스가 “김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타격”이라고 평할 만큼 한미의 시각차만 부각된 외교 참사가 빚어진 것은 부시 행정부가 한반도 정책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한국이 너무 서두른 탓도 있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정상회담 전날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미사일 협상을 계승할 것이라고 했다가 부시의 강한 질책을 받고 발언을 번복한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부시 행정부가 대북 정책 검토를 마치고 북과 진지한 대화를 모색한 것은 1년여 뒤인 2002년 여름이지만 북이 플루토늄에 이어 우라늄을 이용한 핵 개발에 나서면서 북-미 관계는 끝내 클린턴 시절로 돌아가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10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과의 통화에서 가까운 시일 내 방한을 요청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7일 발 빠르게 트럼프를 만나니 우리도 회동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힘을 얻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일찍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만남의 결과가 성공적일 수 있도록 치밀히 준비하는 것이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등 트럼프가 내밀 리스트에 관해 한국 입장을 납득시킬 정교한 논리를 먼저 강구해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의 새 외교안보 라인이 대북 정책을 한국과 협의하려면 현실적으로 시간이 필요하다. 그 사이 대북 제재와 압박의 동력이 떨어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트럼프 행정부가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을 답습하거나 한국이 하자는 대로만 할 리도 없다. 16년 전 미국 정권 교체기에 한국 외교가 조급증으로 범한 실수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 비즈니스 마인드가 충만한 트럼프에게 박 대통령이 신뢰하고 거래할 만한 파트너임을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의 박 대통령이 그럴 준비가 돼 있는지 모르겠다.



한기흥기자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