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적 혁신을 이끄는 괴짜 천재 창업가’라고 하면 누가 떠오르시나요?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팔란티어의 알렉스 카프?
그들보다 훨씬 젊고, 경력과 외양 면에서 더 독특한 인물이 있습니다.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실리콘밸리의 거물, 팔머 럭키(Palmer Luckey) 안두릴 인더스트리(Anduril Industries) 창업자(1992년생)이죠.
‘방산업계의 테슬라’, ‘팔란티어의 하드웨어 버전’으로 불리는 무기제조 스타트업 안두릴. 얼마 전 자금조달 라운드에서 기업가치 610억 달러(약 91조원)를 인정받으며, 설립 9년 만에 ‘세계에서 12번째로 큰 비상장 기업’으로 급성장했는데요. 현실의 ‘토니 스타크’를 꿈꾸는 엔지니어 기업인, 팔머 럭키를 들여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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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의 아버지’에서 ‘방위 산업 혁신가’로 변신한 팔머 럭키. 사진은 지난해 TED 강연 모습. 강연 영상 화면 캡처
*이 기사는 5월 20일(수요일) 발행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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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고에서 코일건 만들던 소년
17살(2009년), 캠핑카에서 가상현실(VR) 헤드셋 시제품을 만들기 시작.20살(2012년),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서 첫 번째 VR 헤드셋 제품 ‘오큘러스 리프트’가 대박.
22살(2014년), 페이스북(현 메타)이 오큘러스를 20억 달러에 인수, 억대 자산가로 등극. (포브스 선정 ‘30세 이하 영향력 있는 30인’)
25살(2017년), 정치적 이유(트럼프 지지)로 페이스북에서 해고당함.
2017년 안두릴을 창업하기 이전까지 팔머 럭키의 경력입니다. 대단히 화려하죠?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집안이 부유했거나, 운이 좋았겠지. 하지만 팔머 럭키의 오큘러스 스토리는 그렇게 뻔하지 않다는 게 재미있는 점인데요.
2015년 방한했을 당시의 팔머 럭키의 모습. 동아일보 DB
자동차 딜러의 아들인 팔머 럭키는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대신 어머니의 홈스쿨링을 받았습니다. 산만하고 에너지 넘치고 공상과학 소설과 비디오게임에 푹 빠진, 본인 말대로 “요즘 같았으면 ADHD라고 했을” 아이였죠.
시간이 많았던 럭키는 10대 시절 집 차고에 처박혀 지냅니다. 거기서 온갖 전자제품을 분해하고 조립하며 놀았죠. 12살쯤엔 홈디포에서 산 가죽장갑에 일회용 카메라 플래시 콘덴서를 잔뜩 붙인 ‘전기충격 장갑’을 만들었고요(금속을 뚫을 수 있었음). 전자기력으로 금속 탄환을 순식간에 가속해 날려 보내는 ‘코일건’을 제작하다가 감전 사고도 당했죠. 이 위험천만한 취미생활을 통해 그는 공학을 독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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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VR 헤드셋이 ‘이미 실패로 끝난 기술’로 취급되던 시절입니다. 소니·도시바 같은 기업들이 1990년대 수천~수만 달러짜리 헤드셋을 내놨다가, 모두 처참하게 실패했기 때문이었죠. VR은 일종의 조롱거리에 불과했는데요.
럭키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단종된 헤드셋 수십 개를 헐값에 사 모았어요. 그걸 뜯어보면서 왜 VR이 실패했는지를 연구했죠. 그리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스마트폰의 기성 부품들을 조합해 자신의 첫 번째 시제품을 탄생시킵니다. 고해상도 디스플레이와 저지연 센서 같은 스마트폰 부품 가격이 과거에 비해 폭락한 시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레딧에 공개된 팔머 럭키의 첫 번째 VR 헤드셋 PR1 시제품 사진. 2010년 8월에 제작됐다고 써있다. 아직 그가 정식으로 오큘러스를 설립하기 이전이다
그는 이후 2년 동안 트레일러에서 50개 넘는 VR 헤드셋 시제품을 만들어 냈는데요. 당연히 부모님의 금전적 지원은 전혀 없었고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개발비를 마련하기 위해 쉼 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죠. 고장 난 아이폰을 수리해서 되팔아서 짭짤한 수입을 올렸고, 롱비치 세일링 센터에서 요트 갑판 청소와 엔진 수리도 했어요.
2012년 8월, 럭키가 VR 헤드셋 ‘오큘러스 리프트’ 판매 프로젝트를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킥스타터’에 공개합니다. 전에 없던 넓은 시야각(110도)을 제공하고 최초로 멀미 현상을 없앤 혁신적인 신제품이었죠. 처음 럭키가 기대했던 펀딩의 목표는 “부품, 제조, 배송, 신용카드/킥스타터 수수료를 충당하고, 축하 피자와 맥주를 사 먹을 10달러 정도만 남기는 것”. 그런데 이 프로젝트는 ‘둠(Doom)’을 개발한 3D 게임계의 전설 존 카맥의 지지를 받으면서 대박이 났고요. 오큘러스엔 거액의 투자금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성공 신화가 시작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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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의 2014년 8월호 표지에 실린 팔머 럭키의 사진. 우스꽝스러운 포즈 때문에 이 사진은 밈이 됐지만, 럭키 본인은 이를 유머로 즐겼다.
페이스북에서 쫓겨나다
럭키는 페이스북에 팔린 뒤에도 오큘러스에서 일했습니다. 여전히 VR 헤드셋의 성공을 위해 매진했죠. 오큘러스는 그에겐 ‘아이’ 같은 소중한 존재였으니까요.하지만 2016년 그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트럼프 지지단체 ‘님블 아메리카’에 익명으로 9000달러를 기부한 후원자가 팔머 럭키란 사실이 언론에 공개된 거죠. 갑자기 ‘오큘러스 창업자가 인종·성차별주의적 밈을 만드는 단체를 후원했다’면서 온갖 비난이 쏟아졌어요.
럭키는 가짜뉴스라며 맞서려 했어요. 님블 아메리카는 인종·성차별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페이스북 측은 이를 막았고, 오히려 그에게 트럼프 지지를 철회하라고 압박했죠. 거세지는 비난 여론 속에서 럭키의 사내 입지는 쪼그라들었고요. 결국 2017년 3월 페이스북은 럭키를 해고합니다. 그의 ‘아이’가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서 말이죠.
럭키는 좌절하는 대신 복수심에 불탔습니다. “저는 경력의 정점에 있을 때 해고당했어요. 정말 화가 났고, 제가 단지 반짝스타가 아니라 여전히 큰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죠.”
럭키는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마음먹었고요. 비만 퇴치, 교도소 개선 같은 사업을 고민하다가, 방위산업으로 결정합니다. 영화 ‘아이언맨’ 속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현실판을 만들기로 한 거죠. 새 스타트업은 영화 ‘반지의 제왕’ 속 아라곤의 검 이름에서 딴 ‘안두릴 인더스트리’. 오큘러스와 팔란티어 출신 엔지니어들이 여기에 합류합니다.
팔머 럭키는 안두릴에서 CEO를 맡지 않고 대신 핵심 기술과 전략을 총괄한다. 사진 출처는 palmerluckey.com
판을 뒤집는 안두릴의 전략
팔머 럭키가 방위산업을 선택한 건 단지 어릴 적 취미 영향은 아니었어요. 실리콘밸리가 외면해 온, 가장 기술적으로 후진적인 분야였기 때문이죠. “기술 기업들은 국가 안보를 남의 문제로 치부했어요. 그 결과 테슬라의 AI는 어떤 미국 항공기보다 뛰어나고, 룸바는 미 국방부 무기 체계보다 자율 주행 능력이 뛰어나며, 스냅챗 필터는 최첨단 군사 센서보다 컴퓨터 비전 기술을 더 많이 사용하죠.”록히드마틴·보잉·제너럴 다이내믹스 같은 전통의 기업이 꽉 잡고 있는 방위 산업을 뒤흔들기 위해 안두릴은 세 가지 핵심 전략을 세웠습니다. 아예 판을 뒤집어버리려는 전략인데요.
①‘내 돈 내 산’ 개발 방식: ‘방위 제품 회사’의 속도전
=기존 방산기업은 화려한 파워포인트 발표로 계약을 따낸 뒤, 정부 예산으로 제품을 설계·개발하죠. 안두릴은 정부 자금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회사 자체 자금을 들여 제품을 만든 다음, 작동하는 완성품(시제품)을 들고 찾아가서 계약을 따내죠. 당연히 다른 기업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제품을 공급하게 됩니다.
럭키는 기업이 자기 돈을 투자하며 위험을 감수해야만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해요. “두려움 속에서 사는 기업인지, 납세자들의 돈으로 라운지를 누리는 기업인지는 큰 차이를 만듭니다. ‘납세자들에게 연간 수천억 달러를 절약해 주면서 우리는 수백억 달러를 버는 것’이 안두릴이 할 일이죠.”
안두릴이 보잉과 록히드 마틴을 제치고 2024년 4월 수주한 미 공군 최초의 자율 전투기 ‘퓨리’는 계약 체결 후 첫 비행까지 556일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하죠. 럭키는 “한국전쟁 이후 가장 빠른 신형 전투기 개발 기록”이라고 자랑스러워합니다.
안두릴은 2024년 4월 전통의 방산업체를 제치고 미국 공군 최초의 자율전투기 ‘퓨리’ 계약을 따내 업계를 놀라게 했다. 조종사 조작 없이 완전 자율 구동되는 이 전투기는 2025년 10월 첫 번째 시험비행에 성공했다. 안두릴 제공
②무기의 두뇌를 지배하다: AI 운영체제 ‘래티스(Lattice)’
=자율 전투기, 자율 탱크, 순항 미사일, 잠수함, 감시타워 등 안두릴의 모든 제품은 ‘공통된 두뇌’를 공유합니다. 바로 AI 운영체제 ‘래티스’인데요.
럭키는 “안두릴은 래티스 개발부터 시작해 그 위에 다양한 제품을 개발했다”고 설명합니다. 하드웨어 중심인 기존 업체와 달리, 소프트웨어가 핵심인 거죠. 래티스가 ‘방산업계의 테슬라’로 불리는 것도 이런 소프트웨어 중심의 운영 때문인데요. 테슬라 전기차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만으로 성능이 달라지듯, 무기체계 역시 코드 수정만으로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AI를 이용해 무기 체계가 더 똑똑하고 강력해지죠.
③과자처럼 찍어내는 무기: 대량생산으로 이기는 법
=만약 미국이 중국과 지금 당장 전쟁을 벌이면 미군이 보유한 탄약이 단 8일 만에 동날 거라고 하죠. 드론전쟁 시대에 소수의 정교하고 비싼 무기로 맞서는 건 비효율적이란 점이 이란전쟁에서도 드러났는데요.
안두릴은 자동차나 트랙터 생산라인에서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그런 무기를 만듭니다. 부품 수를 획기적으로 줄여서 제조공정을 단순화한 거죠. 예컨대 가성비 순항미사일 ‘바라쿠다’는 기존 미사일보다 부품 수가 90%나 적습니다. 그래야만 압도적인 무기 생산물량으로 적을 압도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인 전투함과 잠수함을 만들어서 포장지에 싸인 트윙키(방부제가 많이 든 과자)처럼 창고에 넣어 둘 겁니다. 그건 1000년 동안 보관할 수 있겠죠.”
지난해 안두릴은 메타(페이스북)와 전투용 VR 개발을 위한 파트너십을 맺었다. 팔머 럭키 본인이 10년 전 개발했던 오큘러스의 VR 기술을 안두릴이 이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 이를 기념해 팔머 럭키와 마크 저커버그가 기념사진을 찍어 공개했다. 안두릴 SNS
안두릴의 비전은 미군 현대화를 추진하던 미국 정부의 방향과 맞아떨어졌고요. 특히 트럼프 2기에 들어선 국방 예산 증액의 수혜를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안두릴은 미 육군의 VR 헤드셋 프로젝트, 미 해병대의 드론 방어 시스템, 국방부의 저비용 순항 미사일 공급을 속속 따냈고요. 올여름엔 오하이오주에 무기 공장 ‘아스널 1’을 완공하고 무인전투기 초기 생산에 들어갈 예정이죠.
지난해 안두릴의 매출은 22억 달러, 체결한 계약은 60억 달러에 달합니다. 최근엔 앤드리슨 호로위츠가 주도한 50억 달러 신규투자를 유치하면서, 안두릴의 기업가치가 610억 달러(91조원)로 불어났어요. 1년 만에 두배가 된 거죠.
물론 안두릴의 무기 제조 역량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도 나옵니다. 드론 추락, 무인 전투함 오작동 같은 테스트 과정의 실패가 이어졌고요. 미국 내 제조 공급망을 다시 구축한다는 건 여전히 쉽지 않은 과제니까요. 세마포 보도에 따르면 국방부 실세 스티븐 파인버그 차관조차 취임 초기엔 안두릴이 “진짜 회사”인지 아니면 “장난감만 만드는 회사”인지 의문을 제기했다는데요.
하지만 팔머 럭키는 “똑똑한 사람들은 무언가를 하지 못할 수백만 가지 이유를 찾는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처럼 생각하라. 만약 저 자신을 한마디로 정의해야 한다면 이겁니다. ‘팔머 럭키, 문제 창조자가 아닌 문제 해결사’” By.딥다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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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