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갑영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 인터뷰
정갑영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이 서울 마포구 창전동 유니세프 사무실에서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수연 기자 xunnio410@donga.com
유니세프 한국위원회는 전 세계 32개 선진국 위원회 중 정기 후원자 수가 1위(50만 명 이상)다. 미국, 일본, 독일, 영국과 함께 세계 5대 ‘모금 대국’이다.
한때 국제사회 원조를 받던 한국은 이제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됐다. 세계적으로도 드문 구조다. 특히 2022년 기준 국내 유니세프 기부 총액 15조 원 중 개인 기부는 약 71%를 차지한다. 이는 기업 기부(29%)의 두 배를 훨씬 웃도는 수치다.
이 조직을 이끄는 정갑영 회장은 한국 모금 대국의 원동력을 ‘풀뿌리 기부’ 라고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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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 청년에 버스비 건넨 낯선 노인
기부에 대한 정 회장의 가치관은 사소한 경험에서 시작됐다. 1979년 외국 유학 시절, 버스를 탔다가 당황했던 일이다. 탑승 장치에 동전을 넣고 타는 버스였는데, 정 회장은 낯선 환경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그때 쿼터인지 다임인지 동전의 종류도 잘 구별 못할 때였어요.”
이때 앞 좌석에 있던 낯선 노인이 말없이 일어나 대신 동전을 넣어줬다. 그것도 한명이 아닌 두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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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선행이었지만, 이역만리 타지에서 생면부지의 외국인이 동양인 학생에게 베푼 따뜻한 손길은 지금까지 정 회장의 마음에 남아있다.
고액 기부자의 특징 ‘자수성가’와 ‘고난’
유니세프에 전 재산을 기부한 故박양숙 할머니
정 회장은 고액 기부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자수성가’와 ‘고난‘의 경험이다.
“오랜 기간 관찰한 결과 본인이 자수성가해서 부를 이루고 아주 어려운 일을 겪었던 그런 분들이 많았어요.”
이는 기부가 단순한 ’경제적 여유‘가 아니라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 ‘공감’ 임을 보여준다.
유니세프에는 기적 같은 이야기가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故 박양숙 할머니의 기부다. 2010년 어느날 유니세프에 걸려온 전화 한통. 82세의 할머니가 전 재산을 기부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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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부는 ‘스쿨 포 아시아’라는 글로벌 교육 캠페인의 출발점이 됐다. 현재 아시아 11개국으로 퍼져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정 회장이 연세대를 이끌던 시절 총장실을 찾아와 교육시설 건립에 100억을 기부한 故 김순전 할머니(당시 90세)도 북한에서 이불 하나 갖고 내려와 부를 일궜지만, 자신을 위해선 미장원 한번 제대로 안 갔다고 했다.
정 회장은 교육이야말로 사회의 불균등과 격차를 바꾸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고 강조한다. 본인 역시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 라고 했다.
“한국이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교육이었습니다. 어려운 가정에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그것을 통해 사회적 신분이 바뀌어야 격차가 해소되는 거예요.”
“기부는 시장 경제를 지속하게 하는 힘”
정갑영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이 서울 마포구 창전동 유니세프 사무실에서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수연 기자 xunnio410@donga.com
그는 경제학자답게 기부를 구조적으로 해석한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효율적인 경제 체재는 ‘시장 경제’지만, 그 과정에 불가피하게 ‘불균형’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사회보장 제도를 통해 보완하고는 있지만 그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균형을 맞추는 것이 바로 ’기업가의 기부‘와 ’사회적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애덤스미스의 말대로 시장은 가만히 놔둬도 정부가 관여 안 해도 잘될 수 있는 조건이 있어요. 그건 경제 주체인 기업이나 소비자의 ‘동정심’입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아직 선진국에 비해 기업의 기부가 부족하다. 기업은 특정 이슈에 따라 공공단체에 눈치 봐가며 하는 문화가 있는 것 같다고 정 회장은 진단했다.
정 회장이 말하는 모범은 ‘워런 버핏’식의 마음가짐이다. 버핏은 사후 재산의 99.5% 이상을 자선 목적으로 기부할 것이라고 유언장에 밝혔다.
“내 자식이 똑똑하지 않다면 아무리 많은 재산을 물려 줘도 제대로 유지 못할 것이고, 똑똑하다면 안 줘도 자기가 다 만든다고 하잖아요.”
“우리나라는 기업인에 대한 사회적 리스펙트가 부족한 편인데, 기업의 기부가 늘면 국민들이 기업가를 보는 눈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요.”
‘깐깐하게’ 돈을 받는 이유“
공익 단체를 둘러싼 신뢰와 기부의 투명성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자산가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 자신이 속한 기업이나 가문과 연계된 단체를 설립하는데, 순수하게 제3자를 위해 사용되는 자금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다른 목적으로 활용되는 경우도 있죠.”
유니세프는 기부금을 전달할 때 이미 구축된 조직과 네트워크를 활용하기 때문에 ‘오버헤드’(중간 비용)가 상대적으로 적다고 정 회장은 강조했다.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제공
기부금을 받을 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점도 짚었다. “유니세프는 고개가 너무 뻣뻣하다는 말이 있어요. 기부를 받을 수 없는 ‘블랙리스트’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유니세프는 전쟁 물자를 공급하는 기업, 마약이나 주류, 아동에게 유해한 식품과 관련된 기업 등에게는 기부를 받지 않는다. 개인 고액 기부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기부자의 평판과 위험 요소를 사전에 조사해 걸러내는 ‘레퓨테이션 스크리닝’을 거친다.
이러한 절차는 단기적으로는 기부 유치에 제약이 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직의 신뢰를 높이는 기반이 된다고 했다.
“리더가 개인의 성취감을 위해 움직이면 실패합니다. 조직을 위해 장기적으로 무엇이 옳은가를 생각해야 하죠. 그것이 곧 신뢰라는 자본입니다.”
‘함께미래 리더스’는 공익 현장의 리더들이 어떤 선택과 결정을 통해 변화를 만들어왔는지, 그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통해 미래를 묻는 인터뷰 시리즈다.
박태근 기자 ptk@donga.com김수연 기자 xunnio41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