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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 행복을 만끽하며 지금을 사는 법[고수리의 관계의 재발견]

입력 | 2026-04-16 23:06:00


고수리 에세이스트

스물 후반의 나는,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다가 뒤늦게 방송작가로 전향했다. 살면서 한 번은 도전해 보고 싶어서 선택한 일. 내 선택에 온전한 책임을 지고 싶어서 웃음기 없이 일했다. 송출되기 직전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방송일은 날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매일매일 팽팽하고 변화무쌍했다. 치열한 만큼 보람찼지만, 남들보다 뒤처진 건 아닌지 초조했고 방향을 바꾼 이 길이 맞는지 불안했다. 그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달콤쌉쌀하고 시금털털한 오만 감정들을 맛보며 간절하게 일했다. 마침내 내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자 더욱더 일에 몰두했다. 쪽잠을 자며 초치기로 방송을 만들다가 며칠 만에 귀가하면 우편함에는 밀린 고지서가, 밥솥에는 ‘보온 경과 99시간’이 찍혀 있었다.

하루는 같이 일하던 선배가 바람이나 쐬고 오자며 손을 잡아끌었다. 할 일이 많다는 대꾸에 선배는 문득 진지한 얼굴로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건물을 나서자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선배가 사준 커피를 마시며 나란히 걸었다. 문밖은 어느새 봄, 지천에 꽃이 피어 있었다.

“김연수 작가가 그러더라. 봄에 대해서 쓰고 싶다면, 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쓰지 말고, 무엇을 보고 듣고 맛보고 느꼈는지를 쓰라고. 봄이 되면 무조건 시간을 내서 좋아하는 사람이랑 꽃을 보러 다니고, 잊지 못할 음식을 먹고, 그날의 날씨와 눈에 띈 일들을 일기장에 적으라고. 우리 인생은 그런 것들로 만들어져 있대. 수리야, 너 작가잖아. 햇살이 좋잖아. 꽃이 예쁘잖아. 나랑 커피 마시면서 산책했던 하루를 써야지. 나중에 우리 인생은 이런 것들로 기억될 테니까.”

북향에 비좁은 사무실, 그나마도 칸칸이 나눠진 편집실에만 창문이 나 있어 시종 형광등을 켜두고 일해야 했다. 나는 그 자리에 오도카니 앉아서 시들어가고 있었다. 뒤늦게 시작한 일인 만큼 더 능숙하고 더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밤을 새워 결과물을 내놓았을 때, 잘했다고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런데 선배들은 하나같이 안쓰러운 얼굴로 말해주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 네 젊은 날도 다신 돌아오지 않아”라며.

인생의 어느 시기를 치열하게 살아보는 건 틀림없이 좋았다. 그러나 스스로를 지나치게 다그쳐 삶이 일에 매몰되어 버리자 중요한 것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나의 일상과 관계가, 여유와 웃음이.

선배들의 말이 옳았다. 지나오고 나서야 그때 참 좋았노라 떠오르는 기억들은, 일상의 쳇바퀴를 바쁘게 돌면서도 틈틈이 맛있는 걸 먹고, 예쁜 걸 보고,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던 순간들이었다. 어제를 후회하고 내일을 걱정하며 그늘진 마음으로 시들어가는 나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과 누려 보던 망중한. 행복은 미루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햇살이 좋다고. 꽃이 예쁘다고. 그 봄날의 선배처럼, 나도 누군가의 손을 잡아끌고 싶다. 창밖에 날씨가 좋다. 잠시나마 나가서 제철 행복을 만끽하기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을 살아 보았으면 좋겠다.



고수리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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