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가 직격탄 맞은 프랑스 경제 이란 전쟁 후 휘발유 15% 급등 佛 농가 생산성 최대 50% 감소 우려 냉방비 급등으로 유통업계 창고 재고 급감 유통기한 안 남은 두부 배달도 일부 할인 주유소는 품절 사태 재정위기 佛 유류 지원책 도입 못해
프랑스 청년 농업가 마티유 카펜티어 씨가 10일(현지 시간) 파리 외곽 보베시에 위치한 축산농가에서 고유가 한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농가는 기름값 급등에 트랙터 등 대형 농기계 사용을 중단했다. 파리=유근형 특파원
4월은 밭 갈기, 토양정리, 씨뿌리기 등 봄철 작업이 한창이어야 할 시기다. 하지만 농가 주변은 유독 조용했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 여파로 국제 유가가 급등하자 많은 기름이 필요한 작업을 대폭 줄였기 때문이다. 예년 같으면 하루 6시간 이상 농기계가 돌아갈 시기지만, 올해는 대형 트랙터는 가동을 중단한 채 기름이 적게 소요되는 농기계만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티유 씨는 “예년처럼 농사를 지으면 올해만 약 1만 유로(약 1억7000만 원)의 추가 비용이 든다”며 “농기계 사용을 대폭 줄일 수밖에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란 전쟁이 계속되면 생산성이 작년보다 최대 50%까지 감소할 수 있다. 사업을 계속할지 말지를 선택해야 할 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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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2월 28일 이란 전쟁이 발발한 후 프랑스의 휘발유 값은 최소 15% 급등했다. 7일 미국과 이란이 ‘2주 휴전’을 선언하고 종전 협상을 펼치고 있지만 유가는 내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윗 사진) 프랑스 파리에서 약 30km 떨어진 지역의 한 할인 주유소에 차량들이 가득하다. (아래 사진) 같은 시각 손님이 없어 한산한 인근 일반 주유소와 대조적이다. 파리=유근형 특파원
2022년 2월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연료, 비료 가격의 급등을 이미 겪은 프랑스 농가들은 이란 전쟁까지 터지면서 사면초가에 빠졌다. 마티유 씨는 연료비를 덜 소비하는 직파 등 경작 방식을 바꾸고, 지난해 팔고 남은 구황작물로 가축 비료를 만드는 등 고육지책을 짜내고 있다. 기름을 덜 먹지만 효율성은 떨어지는 옛날 농기계를 창고에서 꺼내 사용하고 수작업도 대폭 늘렸다.
다만 이 같은 조치만으로는 대규모 적자가 불가피하다고 마티유 씨는 말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등 각국 권력자들은 ‘게임’을 하는 기분이겠지만, 전 세계 다수는 연이은 전쟁으로 큰 위험에 처했다”며 “많은 프랑스 농가들이 대출 상환을 못해 연쇄 도산하는 일이 곧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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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물류 유통 업계도 고유가 한파를 그대로 맞고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프랑스 수입업체 등에 따르면 유럽의 3월 해상 운임은 컨테이너당 약 22% 상승했다. 항공 운임도 유류세 인상 여파로 60% 넘게 증가했다.
이 외에도 전기 요금이 올라 냉동창고 보관비 또한 최대 24%까지 인상됐다. 만두 치킨 수산물 등 냉동식품을 다루는 업체들의 비용부담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전민형 aT 파리지사장은 “고유가 여파로 유럽 바이어들이 수입 물량을 축소하거나 가격 인상을 검토하면서 우리 수출 기업들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식품업계는 이란 전쟁 발발 후 이란이 봉쇄 중인 원유 수송로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물류비가 증가한 데 이어 컨테이너들이 제때 도착하지 못하는 배송 지연까지 겪고 있다. 당초 수에즈 운하를 통해 유럽으로 향하던 대형 컨테이너 운반선들이 대거 아프리카 최남단으로 우회하면서 지각 운송 사태가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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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 식품을 보관하는 냉동고도 상황은 비슷했다. 특히 두부는 전쟁 발발 이전에는 대게 유통기한을 최소 3개월 남기고 배송됐지만, 최근에는 운송 지연으로 유통기한이 1달도 남지 않은 제품들이 배송되고 있다. 심지어 유통기한이 거의 다 된 두부도 배달되곤 한다. 에이스푸드 관계자는 “지각 배송된 두부를 팔려면 손해를 보며 세일 판매를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원유에서 추출한 나프타로 만든 특수 포장재 또한 품귀다. 이 포장지 공급이 끊기면 김치 과자 등의 공급에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이에 프랑스 버스, 트럭 등 물류 업계는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출근시간대 파리 시내 곳곳에서 차량을 느리게 운행하며 에마뉘엘 마크롱 정권의 고유가 대책 부재를 비판하는 일명 ‘달팽이 시위’도 간간이 펼쳐지고 있다. 파리의 택시 기사 아밀 씨는 “기름값 때문에 날씨가 더워져도 에어컨을 켜지 못하고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10일(현지 시간) 파리 시내의 한 할인 주유소. 사람들이 몰리면서 기름이 동이 나 ‘운영 중단(사진 속 동그라미·Hors service)’ 조치가 취해졌다. 파리=유근형 특파원
● ‘2유로 상한제’ 할인 주유소는 품절
프랑스 종합 에너지 기업 토탈에너지는 최근 서민들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기 위해 ‘휘발유 2유로(약 3400원) 상한제’를 도입했다. 이후 토탈에너지가 운영하는 파리의 주요 할인 주유소는 고객이 몰려들어 품절 사태를 빚고 있다.
일부 파리 시민은 상대적으로 도심보다 저렴한 외곽의 주유소 찾기에 나섰다. 10일 파리에서 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벨리지 빌라쿠블레의 할인 주요소(리터당 약 3300원)를 찾았다. 입구부터 긴 줄이 만들어져 주유하는데 30분이 넘게 걸렸다. 일부 고객은 긴 대시 시간을 참지 못해 주유를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파리 시민 포파나 씨는 “안 그래도 물가가 비싸니 소비자 입장에서는 선택권이 없다. 저렴한 휘발유를 넣기 위해 이 곳에 올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중교통 인프라가 부족한 파리 외곽 지역에선 연료비 급등이 노동시장 접근성을 저해하고 있다. 매일 60km가량 운전해 출퇴근 하는 세네갈 출신 노동자 씨에나 씨는 “수입은 그대로인데, 한 달 주유비가 1.5배로 뛰면서 아이들 교육비와 식비를 줄여야 할지 고민”이라며 “연료비 부담을 견디지 못해 퇴사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르몽드 등에 따르면 연료비를 줄이기 위해 휘발유 차량에 에탄올 박스를 부착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이 같은 차량은 휘발유와 식물성 기름을 섞은 ‘슈퍼에탄올-E85’ 연료를 사용한다. 장비 부착에 약 900유로(약 153만 원)가 들지만, 연료비를 기존 휘발유 차량의 약 40% 아낄 수 있고 온실가스 배출도 약 78% 줄일 수 있다. 1만km 주행할 때마다 약 500유로(약 85만 원)의 연료비를 절감할 수 있다고 르몽드는 전했다. ‘슈퍼에탄올-E85’ 연료를 취급하는 주유소도 2024년 6%에 불과했지만 최근 40%까지 늘었다고 한다. 파리의 한 정비사는 르몽드에 “새 차량을 사는 구매자들에게 이 장비를 갖추도록 설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고유가 한파를 극복하기 위한 유류세 조정, 보조금 지급 등을 주장한다. 다만 재정 위기에 시달리는 마크롱 정권이 선뜻 실시하기는 어려운 정책들이 대부분이다. 배송기사 니나 씨는 “마크롱 정권은 아무 일도 안 한다. 어떤 대책이라도 내놔야 한다”고 일갈했다.
파리=유근형 특파원 noe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