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식 변리사·전 특허심판원 수석심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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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수동의 좁은 골목을 걷다 보면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건물이 있다. 기존 건축의 문법을 비튼 콘크리트 구조와, 공간 전체를 하나의 경험으로 설계한 이곳은 단순한 상업시설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 작품에 가깝다. 글로벌 아이웨어 브랜드 젠틀몬스터의 신사옥이다.
이 건물은 단순한 외형 이상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젠틀몬스터는 더 이상 안경을 파는 브랜드가 아니다. 이들은 디자인을 매개로 패션과 예술, 공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글로벌 브랜드와 경쟁하는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디자인 역량이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음을 상징하는 이 기업이 지금, 역설적이게도 디자인을 둘러싼 가장 본질적인 분쟁의 중심에 서 있다.
우리는 흔히 디자인을 제품의 겉모습, 즉 심미적 장식으로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하나의 곡선이 완성되기까지는 수만 번의 스케치와 수정, 그리고 숱한 실패의 시간이 축적된다. 안경테의 1mm를 줄이기 위해 밤을 지새우고, 수십 개의 시제품이 폐기된다. 디자인은 우연이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의도이며, 그 의도는 브랜드의 철학으로 남는다. 디자인은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시간과 의도가 압축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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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만 취하는 행위, 그것은 영감이 아니라 시간의 절도다. 타인이 수개월, 수년을 바쳐 일궈낸 브랜드 가치와 성과를 단기간에 가로채는 행위는 공정한 경쟁을 무너뜨린다.
패션 산업은 오랫동안 트렌드라는 이름하에 서로를 참조하며 성장해 왔지만, 참조와 복제는 다르다. 참조는 새로운 가치를 더하지만, 복제는 타인의 노력을 기생의 대상으로 삼는다. 디자인을 베낀다는 것은 형태뿐 아니라 그 안에 쌓인 수많은 디자이너의 시간과 서사까지 가져오는 일이다.
소비자도 이제 변하고 있다. 사람들은 단순히 저렴한 대체재를 선택하지 않는다. 가짜는 형태를 흉내 낼 수 있지만, 시간의 깊이까지는 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대중은 이미 알고 있다.
디자인을 훔치는 시대는 끝났다. 빠른 모방을 통해 성장하는 모델은 글로벌 시장의 기준을 만드는 리딩 국가로 도약하려는 대한민국에 더 이상 지속가능한 모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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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식 변리사·전 특허심판원 수석심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