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간송미술관-군위 사유원
현대인에게 ‘나를 마주하는 시간’은 사치다. 업무에 쫓기고 관계에 얽매인 일상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다. 대구 팔공산 자락에 있는 군위 사유원(思惟園)에서 건축과 자연을 거닐며 명상에 잠기고, 대구간송미술관에서 그림 속 미인과 홀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져 보자.
● 대구는 ‘미인도’의 도시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2024년 가을 대구에도 문을 열었다. 성북동 간송미술관은 ‘훈민정음해례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혜원전신첩’ 같은 국보급 문화재를 다수 소장하고 있지만 그동안 대중과 쉽게 만날 수 없었다. 대구 대덕산 자락에 오픈한 대구간송미술관은 일제강점기 우리 미술품을 지킨 간송 전형필(1906∼1962)의 컬렉션을 상설로 선보일 수 있는 규모의 전시 시설이다.
대구간송미술관 전경. 입구에 11의 소나무 기둥이 공간을 만들어 낸다.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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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대덕산 자락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신윤복 ‘미인도’ 전시회.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이 인공지능(AI) 기술로 미인도를 렘브란트, 모네, 르누아르, 고갱 등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디지털 아트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가체(加髢)를 얹고 다소곳이 서서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는 여인의 자태. 넓은 이마, 가는 눈썹, 앵두 같은 붉은 입술, 가녀린 어깨. 연녹색 치마는 백자 항아리를 닮았고, 단아한 저고리는 정숙함이 풍겨져 나온다. 그러면서도 치마폭 아래로 버선발 한 쪽이 살짝 내비치는 순간의 관능적 여백! 이 모든 것을 하나의 화면에 담아낸 솜씨는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숨을 멎게 한다. 그러나 신윤복의 미인도를 하염없이 바라보게 만드는 것은 바로 눈빛이다. 모나리자를 계속 보게 만드는 것이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라면, 미인도의 눈빛은 내면의 아름다움과 꿈, 처연한 슬픔을 헤아려 보게 한다. 혜원은 화제(畫題)를 통해 “사람의 만 가지 사연을 그림으로 담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현재 전시장에는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이 인공지능(AI) 기술로 미인도를 재해석한 디지털 아트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미인도가 렘브란트의 명암법으로, 모네의 인상주의 붓터치로, 르누아르의 따뜻한 색채로 변신해 살아 숨쉰다. 미인도 인물이 빙글 한바퀴 돌아 뒷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진짜는 7월이다. 미인도 원본만을 위한 상설 전시관이 마침내 문을 연다. 미인도는 서울 성북동 전시장에서 잠깐 나왔다 사라지는 ‘귀한 손님’이 아니라, 대구에 뿌리를 내린 ‘상주(常住) 미인’이 된다.
때로는 그림 한 장이 도시를 먹여 살릴 수 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 통계에 따르면 매년 200만 명이 오로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파리를 방문한다. 관람객 1인이 체류하는 동안 평균 1500유로(약 258만 원)를 쓰니 매년 4조5000억 원 규모의 경제적 파급효과다. 대구간송미술관에서는 4월 추사 김정희 전시, 7월 미인도 상설관 개관에 이어 9월에는 호암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과 협력해 역대 최대 규모 겸재 정선 특별전이 열릴 예정이다. 대구는 ‘미인 도시’를 넘어 ‘한국 전통 미술의 수도’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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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려온 풍경’ 팔공산 산그리메
대구에서 차로 약 1시간 거리. 군위군 부계면 팔공산 자락에 있는 사유원은 자연과 건축이 어우러진 수목원이다. 포르투갈 출신 건축가 알바로 시자, 한국 건축가 승효상 같은 거장들의 작품이 정원 곳곳에 들어서 있다. 일반에 공개된 것은 약 5년 전. 본격적으로 관람객을 받은 것은 약 3년 전부터 시작됐다.
사유원에서는 31일까지 매화 축제가 열리고 있다. 백매화, 홍매화, 흑룡금매화, 운용매화 같은 다양한 매화가 어우러져 봄 풍경을 만든다. 그러나 사유원을 직접 걸어 보니 주인공은 매화도, 건축도 아니었다. 바로 멀리 마주보이는 팔공산의 겹겹이 이어진 능선이 웅장하게 펼쳐지는 산그리메였다.
대구는 도시 자체가 자연이 만든 대규모의 지형 예술이다. 북쪽에는 팔공산(해발 1193m)의 거대한 산줄기가 동서로 뻗어 있고, 남쪽에는 비슬산(1084m) 높은 능선이 도시를 감싼다. 서쪽에는 가야산(1430m)이 위용을 드러내고, 동쪽으로 도덕산 응해산 응봉산 문암산 등이 고리 모양으로 대구 도심을 호위한다. 신천과 금호강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며 분지(盆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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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사유원을 걸으며 바라보는 맞은편 팔공산 풍경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높게만 보였던 산이 어느덧 눈높이를 마주하면서 포근한 품을 넉넉하게 보여 준다. 곡선의 산책로, 정자, 물과 돌의 배치는 모두 팔공산으로 시선을 유도하기 위한 장치다. 특히 ‘정향각(呈香覺)’ 정자 앞에 놓인 바위 끝부분이 팔공산이 펼쳐 내고 있는 스카이라인과 일치하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은 묘한 재미를 주기도 했다.
사유원 야외음악당 너머 팔공산 스카이라인.
포르투갈 건축 거장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소요헌 입구의 두 갈래 길.
한쪽은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다른 한쪽 길은 어둡다. 어디로 갈 것인가. 빛을 찾아갔더니 허공에 십자가 같은 철제 조각이 매달려 있고, 다른 한쪽 방에는 알이 놓여 있다. 어둠과 빛, 생명과 죽음의 순환을 생각하게 한다.
원래 소요헌은 알바로 시자가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전시하기 위해 설계한 공간이었는데, 그 꿈이 실현되지 못하고 결국 사유원으로 오게 됐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중 독일과 이탈리아 파시스트 공군이 바스크 지역 게르니카를 폭격했을 때의 참혹함을 그린 작품이다. 다시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는 시대. 소요헌은 삶과 죽음을 명상하기에 좋은 곳이다.
소요헌 북카페 ‘요요빈빈’에 있는 알바로 시자의 누드 크로키 드로잉 벽화.
글·사진 대구=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