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광고 로드중
“서점에서 휴대전화 번호를 원서 접수하듯 따는 게 말이 되나요.”
23일 오후 5시 30분께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 이른바 ‘헬요일’로 불리는 월요일 퇴근 시간대였지만 매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책장 사이 바닥에 앉아 읽는 사람부터 서서 페이지를 넘기는 사람까지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연령대와 성별도 다양했다.
최근 MZ세대 사이에서 만남의 방식은 빠르게 다양해지고 있다.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사람을 만나는 ‘로테이션 소개팅’이나 ‘솔로 파티’부터 사찰에서 진행되는 소개팅 프로그램 ‘나는 절로’까지 등장했다. 결혼정보회사 듀오 관계자는 이러한 변화가 짧은 시간 안에 상대를 판단하고 관계를 빠르게 형성하려는 MZ세대의 연애 방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이 같은 흐름이 서점으로까지 확산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는 “교보문고가 번따(번호를 따다)의 성지”라는 게시글이 잇따르고, 이를 직접 체험한 뒤 후기를 공유하는 숏폼 콘텐츠도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에 대한 거부감도 적지 않다. 실제로 교보문고에서 ‘번따’를 당했다는 A씨는 자신의 SNS에 “교보문고에서 번호를 물어보는 일을 겪었는데 매우 불쾌했다”며 “나뿐 아니라 뒤에 있던 다른 여성에게도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당황스러웠다”고 적었다. 해당 글에는 “책이 아니라 전화번호 쇼핑하러 왔냐”, “무슨 원서 접수하냐”, “당분간 교보문고에 가기 싫다” 등의 댓글이 이어졌다. 또 다른 이용자 B씨 역시 “이 정도면 교보문고 브랜드 이미지 훼손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광고 로드중
반면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공통된 인식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었다. 번호를 따인 경험이 있는 주씨 역시 이러한 유행에 대해 “서점은 건실하고 지적인 사람이 올 거라는 예상 때문에 더 괜찮은 이성을 만나려고 이런 현상이 생긴 것 같다”며 “서점 일대가 조용하니 번호를 묻기도 편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서점 이용자들의 반응도 엇갈렸다. 퇴근 후 교보문고를 자주 찾는 안모(26)씨는 “서점이 ‘연애하기 괜찮은 사람이 모여 있는 장소’라는 글을 온라인에서 많이 본 것 같다”며 “시끄러운 술집보다 취향이 맞거나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높다는 인식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점에서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거는 상황에 대해서는 “질문의 내용에 따라 다르겠지만, 서점을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경험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안씨는 또 “예전에는 단순히 책을 구매하는 공간이었다면 최근에는 문구류나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트렌드를 접하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반면 이러한 접근이 부담스럽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홍씨(33)는 “교보문고에서 ‘번따’라는 문화가 있는지 몰랐다”며 “저는 책을 보러 오는 것인데 번호를 따는 사람이 있다면 부담스러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교보문고 번따’라는 말을 들으니까 더 의식하게 되는 것 같고, 서점이라는 목적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라며 “조용히 책을 읽다 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아이 둘의 손을 잡고 책을 고르던 최씨(42)는 “요즘 젊은 세대의 문화를 몰라서 ‘번따’라는 단어도 처음 들어본다”며 “아이들과 종종 책을 보러 오는데 그런 문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묘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변화가 개인화된 취향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MZ세대의 관계 형성 방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온라인에서 시작된 취향 기반 네트워크가 오프라인 공간으로 확장되면서 서점과 같은 장소가 새로운 사회적 교류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광고 로드중
조용히 사유하는 공간으로 여겨졌던 서점이 이제는 새로운 만남의 장소로도 소비되고 있다. 취향 기반 공간에서 자연스러운 인연을 기대하는 흐름과 개인의 몰입을 침해하는 행위라는 비판이 맞서는 가운데 ‘교보문고 번따’는 MZ세대 연애 문화의 또 다른 경계선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