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중장비 업체 ‘캐터필러’
캐터필러 전기덤퍼
최중혁 팔로알토캐피탈 대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1925년 미 캘리포니아에서 트랙터 회사 두 곳이 합병해 탄생한 이 ‘올드 이코노미(Old Economy)’의 대명사가 어떻게 AI 시대의 숨은 수혜주로 떠올랐을까.
답은 의외의 곳에 있었다. AI를 돌리려면 데이터센터가 필요하고, 데이터센터를 가동하려면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다. 캐터필러는 바로 그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기와 엔진 분야의 세계적인 제조사다. 월가는 더 이상 캐터필러를 땅을 파고 건물을 짓는 전통 제조업체로만 보지 않는다. 미국 제조업 부활과 AI 데이터센터 붐, 에너지 전환이란 메가 트렌드가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는 ‘구조적 성장주’로 재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고 로드중
캐터필러의 역사는 곧 미국 인프라의 역사다. 1925년 캘리포니아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던 두 트랙터 회사 ‘홀트 매뉴팩처링’과 ‘C. L. 베스트 트랙터’의 합병으로 탄생한 이 기업은 어느덧 설립 100년을 넘긴 거목이 됐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농업 불황으로 재정난에 시달리던 두 트랙터 회사는 경쟁 대신 협력을 택했다. 이들의 합병으로 출범한 회사의 이름은 ‘캐터필러 트랙터 컴퍼니’였다. ‘캐터필러’는 1904년 홀트가 최초로 연속 트랙(무한궤도)을 장착한 트랙터를 개발하면서 붙여진 별명에서 유래했다. 트랙이 마치 애벌레(caterpillar)가 기어가는 것처럼 움직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의 진흙탕을 건너기 위해 개발된 무한궤도 트랙터에서 시작된 혁신은 후버댐, 금문교 등 대형 인프라 프로젝트와 함께 성장했다.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글로벌 건설기계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많은 투자자는 여전히 캐터필러를 공사장의 굴착기와 불도저를 파는 회사로만 인식한다.
데이터센터發 제2의 전성기
광고 로드중
전통적으로 주력은 건설산업 부문이었다. 굴착기와 휠로더, 불도저, 모터 그레이더 등 건설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란 장비들이 이 부문에서 나온다. 자원산업 부문은 대형 광산 트럭과 채굴 장비를 담당한다. 최근 월가의 시선을 사로잡은 곳은 에너지·운송 부문이다. 석유·가스 시추용 엔진과 철도 기관차, 데이터센터용 예비 전력 발전기가 여기에 포함된다. 월가에서 “엔비디아가 AI의 두뇌라면, 캐터필러는 그 두뇌를 멈추지 않게 하는 심장”이란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AI 모델을 학습하고 추론하는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을 소비한다. 전력망 연결에 수년이 걸리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 보니 운영사들은 자체 발전 설비를 구축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여기서 캐터필러의 대형 발전기와 산업용 엔진이 핵심 역할을 한다. 특히 AI 데이터센터의 백업 전원은 물론이고 주 전원으로도 활용되는 발전기의 핵심 부품인 왕복동 엔진의 매출 증가세가 두드러진다.
캐터필러의 주주 환원 정책 역시 월가에서 ‘교과서’로 통한다. 캐터필러는 설립 이후 매년 현금 배당을 지급해 왔고, 2025년까지 32년 연속 배당금을 인상하며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배당 귀족(Dividend Aristocrats) 지수에 이름을 올렸다. 장비를 판매한 뒤 부품 교체와 정비, 소프트웨어 솔루션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서비스 매출’이 전체 매출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며 안정적인 현금 흐름을 만들어낸 덕분이다.
광고 로드중
화려한 성장 이면에는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다. 가장 큰 도전은 관세비용이다. 미중 무역 갈등과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강화된 관세정책 여파로 수입 원자재와 부품 가격이 급등하며 캐터필러에 원가 부담이 크게 늘었다. 이로 인해 2025년 한 해 동안 17억 달러의 순 관세비용을 감당해야 했고, 올해는 그 규모가 26억 달러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경기 순환성 역시 캐터필러가 늘 안고 가는 숙제다. 건설장비와 광산장비 수요는 경기 사이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세계 최대 원자재 소비국인 중국의 경기 침체는 글로벌 광산 경기 전반에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후 2∼3년은 캐터필러에 역사적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골드만삭스와 JP모건 등 주요 투자은행들은 “미국 인프라 투자와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캐터필러 실적을 방어하는 강력한 방파제가 될 것”이라며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캐터필러는 올해도 건설산업, 자원산업, 에너지·운송 등 세 부문에서 매출 성장을 예상하고 있다. 특히 AI 관련 투자 확대에 힘입어 에너지·운송 부문이 가장 높은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미국 정부가 주도하는 제조업 르네상스 역시 캐터필러의 등 뒤에서 부는 순풍이다. 인프라 투자 및 일자리법(IIJA), 반도체 지원법(CHIPS Act),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은 캐터필러에 종합선물세트와 다름없다. 텍사스와 애리조나 등지에는 삼성전자, TSMC, 인텔의 공장이 들어서고 있고, 미 전역에서는 노후 교량과 도로 교체 사업이 잇따르고 있다. 과거에는 경기 변동에 따라 건설 투자가 출렁거렸지만, 지금은 정부 예산이 투입되는 10년짜리 장기 프로젝트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월가 컨센서스에 따르면 캐터필러의 2026년 매출은 약 700억 달러를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노란 거인의 변신은 현재진행 중
캐터필러는 한때 올드 이코노미의 상징이었다. 월가에서는 ‘경기 순환주’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이 100년 기업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붐이라는 뜻밖의 수혜를 발판 삼아, 전통 인프라와 신흥 AI 인프라를 동시에 아우르는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노란 불도저와 굴착기가 도로와 건물을 만들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게다가 캐터필러는 AI 시대의 전력 인프라까지 만들고 있다. 캐터필러의 변신은 현재진행형이다. 월가는 이 노란 거인이 써 내려갈 다음 장을 주목하고 있다.
필자(최중혁)는 미국 미시간대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은 뒤 삼성SDI America, SK Global Development Advisors 등을 거쳐 미 실리콘밸리 소재의 사모펀드 팔로알토캐피탈(Palo Alto Capital)을 설립해 운용하고 있다. ‘트렌드를 알면 지금 사야 할 미국 주식이 보인다’ ‘2025-2027 앞으로 3년 미국 주식 트렌드’ 등의 저자다.
최중혁 팔로알토캐피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