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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피해 참사는 착한 사람일수록 손해를 본다는 불편한 진실을 일깨워 줬다. 임신한 아내, 사랑스러운 아이, 편찮으신 부모님의 호흡기 건강을 위해 매일 가습기를 틀었다. 세균·곰팡이 번식을 막기 위해 꼼꼼히 청소하면서 살균제도 잊지 않았다. 그땐 미처 몰랐다. 가족을 생각하는 극진한 마음이 죽음의 수증기가 되어 가족의 폐를 완전히 망가뜨릴 줄은…. 내 손으로 독극물을 전파했다는 죄책감에 피해자 가족들은 무한 감옥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극은 당신 때문이 아니라고, 국가에도 책임이 있다고 처음으로 정부가 인정했다. 24일 정부는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사회적 참사’로 공식 규정했다. ‘참사의 공동 책임자’로서 정부가 배상을 비롯한 피해 구제를 주도하겠다고 했다. 피해 사실이 확인된 2011년 이후 14년 만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24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모든 피해자와 유가족들께 머리 숙여 애도와 위로를 전한다”며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근본적으로 점검하겠다”고 했다.
▷‘조용한 살인자’가 된 가습기 살균제는 1994년 처음 등장했다. 제대로 된 안전성 검사도 없이 기업들은 ‘인체에 무해하다’며 앞다퉈 제품을 출시했고, 정부는 ‘세계 최초의 창의적 제품’이라며 KC마크까지 달아줬다. 2000년대 들어 기침 등 이상 증세를 호소하는 사람이 늘었지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2011년 임신부들의 ‘원인 미상 폐 질환’이 집단 발생한 후에야 역학조사 결과 가습기 살균제와 폐 손상의 인과관계가 처음 확인됐다. 현재까지 공식 피해자는 5942명, 사망자는 1382명에 이르는데 미신고 사례 등을 포함하면 실제 피해 규모는 훨씬 클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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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사회적 참사’로 인정한 정부는 손해배상 책임을 기업과 국가로 넓히기로 했다. 치료비뿐만 아니라 사고로 장래 벌 수 있었던 소득을 잃은 손해와 위자료도 지급하고 학업, 병역, 취업 등 생애 전 주기에 걸쳐 피해자를 지원하기로 했다. 적절한 배상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등 남은 숙제가 많다.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는 사회적 참사 피해자들의 눈물을 정부가 제대로 닦아 주길 기대한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