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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속하려 할수록 버림받는 운명… 핏빛 낙조처럼

입력 | 2025-11-27 03:00:00

[한시를 영화로 읊다] 〈119〉 정치적 음모 속의 낙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순응자’(1970년)에서 주인공 마르첼로가 정상인이 되기 위해 권력에 순응하여 정치적 암살에 협력했다면, 조선 후기 목호룡은 자신의 신분적 결함을 메우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정치적 음모에 가담했다. 목호룡이 1722년 노론이 경종을 시해하려 한 역모의 증거로 든 것 중 하나는 이희지(李喜之·1681∼1722)의 낙조를 읊은 시였다.

시는 김춘택이 낙조를 읊은 시에 차운하는 형식으로 쓴 것이다. 한시에서 낙조는 인생무상, 망국의 슬픔, 이별의 회한, 향수, 노년 등과 연결되곤 한다. 김춘택의 시는 낙조를 보며 느끼는 아쉬움을 나라 위해 목숨 바친 남송의 충신 문천상의 일편단심과 연결시키고 있는데(‘積石山觀落照’), 이희지는 그 내용을 이어받아 암울한 시대 현실에 대한 우려를 분명히 했다. 이 시는 후일 세상을 걱정하는 충정이 담긴 작품으로 평가됐다(이덕무, ‘淸脾錄’).

서얼 출신의 남인이었던 목호룡은 애초엔 노론 인사들에게 접근하여 이희지와도 교유했다. 그는 이 시의 “반쯤 떨어졌으니 어쩔 수 없구나(無可奈何方半墜)”가 경종의 쇠약함을 비유하여 비방한 것이라고 무고(誣告)했다. 이희지는 국문(鞠問)을 받는 과정에서 낙조를 읊은 시는 오래전 지은 것이고 임금의 병환과는 무관하다고 결백을 주장했지만, 임금을 비방한 시(‘續永貞行’)가 더 있다는 죄목까지 추가되어 여덟 차례의 가혹한 고문 끝에 죽고 말았다. 이 일로 이희지의 모친과 아내 정씨마저 백마강에 투신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영화 ‘순응자’에서 마르첼로는 정상인이 되기 위해 파시스트 정권에 가담해 반(反)파시즘 운동가인 은사 콰드리 교수를 암살하는 데 협력한다. 백두대간·일미디어 제공

영화에서 마르첼로는 어린 시절의 충격적 사건으로 인해 정상인처럼 보이기 위해 무솔리니 치하 파시스트 정권에 순응한다. 마르첼로는 지령에 따라 파리에서 반(反)파시즘 활동을 하는 자신의 은사 콰드리 교수 부부 암살에 협력하고, 교수 부인의 살려 달라는 애원마저 차갑게 외면한다.

영화는 빛과 그림자를 대비시킨 촬영감독 비토리오 스토라로의 독특한 화면 구성으로도 유명하다. 영화 속에서 황홀하기까지 한 낙조의 아름다움은 주인공의 황량한 내면과 대비되며 정상인이 되고 싶은 욕망을 암시한다.

목호룡은 이희지를 포함한 노론 인사들을 무고한 덕분에 공신으로 대우받으며 소론 정권 아래에서 부와 권세를 누렸다. 하지만, 영조가 즉위한 뒤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영화 속 마르첼로가 파시스트 정권 붕괴 뒤 과거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타인에게 전가했다면, 목호룡은 국왕과 왕실을 보위하기 위한 충정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항변하다가 자신의 운명 역시 낙조처럼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이르게 된다. 목호룡은 자신이 무고한 이희지처럼 국문 도중 죽음을 맞았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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