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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조건희]땅 팔아 곳간 메우는 지자체, ‘재투자’ 원칙 법에 새겨야

입력 | 2025-11-23 23:12:00

조건희 사회부 차장


울산 태화강 유채꽃 단지에서 주택가로 걸어서 5분. 빨간 벽돌 2층 건물이 하나 보인다. 30년 넘게 아이들을 길러낸 공립 어린이집이지만 지난해 2월 저출생의 흐름을 못 이기고 문을 닫았다. 땅과 건물을 팔아버려 급한 재정을 메우면 쉬웠을 것이다. 실제로 대다수 지방자치단체가 그렇게 한다.

하지만 울산시는 다른 길을 택했다. “주말·야간 돌봄 공백이 크다”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 지난해 7월 ‘365일 24시간 긴급 돌봄센터’로 탈바꿈시켰다. 지난달까지 연인원 7000명 넘게 이용했다. 문 닫았던 공간에 다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넘친다. 지자체 재산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지역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안타깝게도 이런 선택은 드물다. 동아일보 ‘땅 팔아 곳간 메우는 지자체들’ 시리즈(18, 19일 자) 보도처럼, 많은 지자체가 재산을 일회성 지출과 맞바꾼다. 전남 목포시는 2021년 유달경기장 부지를 936억 원에 팔았는데, 그중 약 300억 원을 현금을 뿌리거나 빚을 갚는 데 썼다. “새로운 재산 조성에 쓰라”는 조례를 스스로 어겼다.

더 큰 문제는 제값도 못 받는 사례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최근 5년간 지자체 재산 매각 1532건 중 96.6%가 공개경쟁 입찰이 아닌 수의계약이었다. 감정가보다 30억 원 이상 싸게 팔리거나 담당 공무원이 20억 원 가까이 뒷돈을 챙긴 사건까지 있었다. 감시의 사각에서 지자체 재산은 특혜와 비리의 온상이 돼버렸다.

행정안전부가 이제라도 손을 보겠다고 나선 건 다행이다. 지자체가 재산을 제값에 팔 수 있도록 전문기관을 세우고, 5년마다 바닥까지 조사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자체 홈페이지에 흩어진 정보도 하나의 플랫폼으로 통합한다. 검증 체계를 갖추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핵심이 빠졌다. 매각 대금을 어디에 쓸지, 그 원칙이 없다. 지자체 재산을 팔아 부족한 세입을 메우는 건 국민연금 개혁을 미루거나 국채를 무턱대고 찍어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미래 자산을 지금 세대가 먼저 써버려 ‘세대 간 계약’을 어긴다는 점에서다. 다른 점은 지방 재산 매각은 모두의 눈 밖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용히, 서서히.

지금 필요한 건 ‘재투자’ 원칙이다. 땅을 팔았다면 그 대금은 반드시 또 다른 자산이나 성장 기반에 다시 투자하도록 법으로 의무화하는 것이다. 특히 도시의 전략적 기반이 될 자산이라면 더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600조 원이 넘는 지자체 재산이 노인 돌봄·복지 지출을 메우는 현금인출기로 전락할 것이다.

강원 영월군의 방식을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부터 자투리땅이나 폐광 시설을 팔아 확보한 돈은 일반회계에 섞지 않고 따로 기금에 적립하고 있다. 그리고 기금으로 노른자 땅을 사들여 공업단지 임대주택 설치 같은 장기 프로젝트의 기반으로 삼는다. 빚을 메우는 대신 지역의 미래를 설계한 것이다.

지자체 재산을 지키고 키우는 건 미래 세대와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다. 오늘 거위의 배를 가르면 내일은 황금알을 얻을 수 없고, 숲을 베어 겨울을 나면 여름엔 산사태를 걱정해야 한다. 땅을 팔아 곳간을 메우는 우리의 선택은 얼마나 다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조건희 사회부 차장 bec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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