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 한명회 호 따서 지은 정자 반구정, 황희 정승 말년에 머물러 태종-신덕왕후 악연 보이는 정릉 신당동, 망자 달랜 무당집 모인 곳
《궁금하다 생각했지만 그냥 지나쳤던, 하지만 알아두면 분명 유익한 것들이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일 수도 있고 최신 트렌드일 수도 있죠. 동아일보는 과학, 인문, 예술,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오∼ 이런 게 있었어?’라고 무릎을 칠 만한 이야기들을 매 주말 연재합니다. 이번주는 역사편입니다.》
영화 ‘관상’의 한명회(김의성·왼쪽 사진)와 수양대군(이정재). 한명회는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데 책사로서 큰 역할을 한다. 압구정동(서울 강남구)이라는 이름은 한명회가 자신의 호 ‘압구’를 따서 지은 정자 ‘압구정’에서 비롯됐다. 쇼박스 제공
당시 젊은이들 가운데 역사를 잘 모르는 이들은 김종서가 수양대군을 막아낼지, 수양대군이 왕위를 거머쥘지 가슴 졸이며 영화를 봤다고 한다. 한데 영화를 보기도 전에 수양대군이 왕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스포일러라며 강하게 반발한 것. 이에 “한국사 교육을 어떻게 하길래 이 지경이 됐느냐”는 한탄 속에 “우리 역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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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구정, 갈매기와 벗하는 정자
겸재 정선의 화첩 ‘경교명승첩’에 수록된 압구정. 가운데 언덕 위 기와집이 한명회가 만든 정자 압구정이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겸재 정선의 화첩 ‘경교명승첩’에 압구정 모습이 잘 담긴 그림이 있다. 그림 중간 언덕 위에 있는 정자가 압구정이다. 이 작품은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에서 올 4∼6월 열린 ‘겸재 정선’ 전시회에서 선보였다. 관람객들은 조선 시대 고즈넉한 압구정 풍경에 큰 흥미를 나타냈다.
한명회 시대 압구정은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였다. 점차 서울이 확장되고 1970년대 도시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현재 압구정동이 됐다. 정자는 사라졌지만 정자 터인 압구정 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에는 ‘狎鷗亭址(압구정지)’라고 새긴 바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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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낸 ‘반구정’(경기 파주시). 갈매기를 벗 삼는 정자라는 뜻이다. 파주시 제공
‘정자는 파주에서 서쪽으로 15리 지점인 임진강 하류에 있고 매일 조수가 빠져 뭍이 드러나면 하얀 갈매기들이 날아든다. 주위가 편편해 광야도 백사장도 분간할 수 없다. 9월쯤 되면 철새들이 보이기 시작하며 서쪽으로 바다 입구까지 20리가량 된다.’
● 청계천 광통교, 태종의 증오 고스란히
“정조?… 정종?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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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의 무덤이다. 본래 서울 중구 정동에 있었다. 신덕왕후를 매우 사랑한 이성계가 자신이 지내던 경복궁 인근에 무덤을 두려 해 사대문 안인 정동에 둔 것.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무덤인 정릉(위 사진). 서울 중구 정동에 있었지만 신덕왕후를 증오한 태종이 현재 자리인 서울 성북구로 옮기고 무덤 장식물을 청계천 다리 공사에 쓰게 했다. 청계천 광통교 아래 구름과 도사, 불교 법구인 금강저 등이 새겨진 석물들은 무덤을 장식했던 조각품이다. 서울관광재단 제공·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태종은 신덕왕후 무덤을 이장하도록 하면서 무덤 주변 비석과 석상도 제거했다. 심지어 그 석상들을 청계천 다리 공사에 사용하게 했다. 현재 청계천 광통교 아래 화려한 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진 돌들이 그 석상들이다. 당대 최고 조각가 솜씨로 알려졌다. 태종과 신덕왕후의 악연을 오늘날에도 선명하게 보여 준다.
이 석상들은 청계천에 잠겨 있던 덕분에 훼손되지 않고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았다. 풍성한 구름과 도사, 양끝이 갈고리처럼 생긴 불교 법구 금강저, 그리고 금강저 가운데 자리한 태극 문양 등을 볼 수 있다. 도교와 불교 문화가 섞여 있는 이 조각들에서 유교가 강력하게 정착하기 전인 조선 초 시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중구 정동은 정릉을 처음 조성한 곳이어서 정릉의 ‘정’ 자를 가져와 이름 지었다. 이후 정릉이 옮겨진 현재 지역은 정릉동이 됐다.
● 순우리말 이름이 한자로 바뀌기도
떡볶이로 유명한 서울 중구 신당동 이름은 무당들이 신당(神堂)을 짓고 살았던 데서 비롯됐다. 이후 신당과 발음은 같고 한자만 바꾼 ‘신당(新堂)’으로 표기했다.
조선 시대에는 도성 안에 무덤을 만들 수 없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같은 공간에 있는 건 유교적 가치관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성은 양기가 흐르는 곳이기에 음의 기운이 있는 무덤은 피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사람이 죽으면 사대문 밖으로 시신을 내보냈다. 시신이 나가던 문 근처에 공동묘지가 생기고 망자를 달래는 무당집이 늘어나면서 신당으로 불리게 됐다.
따라서 신당동도 조선 시대에는 도성 밖 지역이었다. 도성 사대문(숙정문 흥인지문 숭례문 돈의문) 옆에 작은 문인 사소문이 있었다. 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이다. 신당동은 한양 동남쪽 광희문 근처에 있다. 조선 시대에는 광희문을 시구문(屍口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서울 중구 북창동 이름은 조선 시대 재정기관 선혜청이 군량미 등을 비축한 곡물 창고 북쪽에 있는 동네인 데서 유래했다. 서울 중구 남창동은 선혜청 창고 남쪽에 해당돼 이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동묘(東廟)는 ‘삼국지’의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공식 이름은 ‘동관왕묘(東關王廟)’로 ‘동쪽에 있는 관왕, 즉 관우의 사당’이라는 뜻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대가로 사당을 지으라는 명나라 요구로 세워졌다. 중국인은 관우를 용맹과 정의, 충의의 상징이라고 여기며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전쟁의 신으로 모셨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들은 관우의 기운을 받기 위해 성주, 안동, 남원 같은 주둔지에 관우 사당을 세웠다.
순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쓴 곳도 많다. ‘명량대첩’으로 유명한 명량(鳴梁)은 순우리말 울돌목을 한자로 쓴 것이다. 진도와 육지 사이 좁은 해협에 매우 거센 물살이 흐르는데 그 소리가 마치 크게 우는 듯하다 하여 울돌목이라고 불렀다.
서울 마포구 애오개는 아이 아(兒)와 고개 현(峴)으로 적어 ‘아현’이 됐다. 현재는 兒를 언덕 아(阿)로 바꿔 ‘阿峴(아현)’으로 적고 있다. 아현과 애오개는 서울지하철 2호선 아현역, 5호선 애오개역에 각각 쓰인다. 서울 강남구 대치와 한티도 마찬가지다. 큰 고개라는 뜻의 우리말 한티를 큰 대(大), 고개 치(峙)를 써서 대치로 쓴 것. 두 단어는 같은 뜻이지만 서울지하철 3호선 대치역, 수인분당선 한티역에서와 같이 다른 지명처럼 인식되고 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