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는 크게 두 가지 부류가 있다. 많은 걸 준비하고 떠나는 자와 우연의 음악에 몸을 내맡기는 자. 이번 여행에서는 후자가 되어 보기로 했다. 남해에 가 보기로 한 것은, 귀촌 청년들을 연구하다가 그곳의 매력에 빠져 정착한 여성 건축가 지인의 일상이 건강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남해에서 사귄 벗들과 논길을 달리고, 텃밭 채소들로 집밥을 만들어 먹고, 동네 서점에 가서 차를 마시고 뜨개질을 했다. 너무 꽉 짜인 일정엔 새로운 모험이 들어설 틈이 없지 않던가. 별 계획을 세우지 않고 남해로 향했다.
● 바닷가 마을에서 만난 생각의 공간
이번 여행의 첫 행선지가 남해도서관이었던 것은 지역 문화에 대한 놀라운 발견이었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읍내에 자리 잡은 남해도서관은 작가 초청 강연과 평생학습 프로그램이 풍성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어르신들이 도서관을 일상으로 이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공공도서관이 잘 운영될수록 선진국일 것이다. 호젓한 바닷가 마을 도서관 사서의 삶이 문득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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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한옥카페 겸 독립서점인 ‘흙기와’.
몇 해 전 가족이 남해로 내려왔다는 책방지기는 자신이 읽었던 책들과 신간을 책장에 함께 꽂아 두었다. ‘책을 고르고 샀을 때의 감정과 이유, 생각을 뼈대 삼아 서가의 책들을 구분했습니다.’ ‘빛은 얼마나 깊이 스미는가’라는 책이 마음에 들어왔다. 각자의 생존 방식으로 고립된 바다에서 공존하는 심해 해양생물을 떠올리는 시간. 남해의 서점이 준 생각의 선물이었다.
● 다랑논과 당산나무가 있는 시크릿가든
남해군은 1973년 남해대교로 육지와 이어지기 전에는 남해도(南海島)라는 섬이었다. 섬 전역에 꽃이 많아 ‘꽃섬’으로 불렸다. 그중 상주면 두모마을은 단연코 남해의 ‘시크릿가든’이다. 봄이 되면 다랑논에 노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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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모마을에는 230세 된 당산나무가 있다. 그 나무 그늘 밑 평상은 마을 사람에게도, 외지인에게도 환대의 공간이리라. 뭔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저 평상에 대자로 누우면 나무가 바람결을 통해 답을 찾는 길을 안내하지 않을까.
상주은모래비치는 호수 같은 바다 앞에 은빛 가루를 뿌린 듯한 백사장이 2km나 이어졌다. 모래가 맨발에 닿는 감촉이 신비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앵강만 해안길을 달려 숙소가 있는 선소마을로 왔다. 바다에 살포시 내려앉는 분홍빛 노을이 마음속에도 번졌다.
● “나답게 나이 들고 싶어 만든” 정원
경남 남해의 숨은 산책 명소인 선소해안산책로. 선소마을 지역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숙소 ‘선소207’ 뒤편에서부터 시작해 소박한 어촌 풍경이 펼쳐진다.
경남 민간정원 1호인 남해의 ‘섬이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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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정원은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계속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은목서와 후피향나무 같은 난대 수종들이 수벽(樹壁)을 만들어 각 정원이 마법의 방 같다. 모네 정원, 하늘연못 정원, 물고기 정원…. 숲속 오두막, 뾰족 지붕 유리 온실, 빨간색 공중전화 부스까지 만나면 다음엔 또 뭐가 나올까 궁금해진다. 차 대표가 “진짜 비밀의 공간을 알려드릴까요?”라며 3분여 차를 몰고 안내한 곳은 인근 편의점. 은청색 망망대해와 초록의 남해바래길을 내려다보며 먹는 메로나 아이스크림이 꿀맛이었다.
● 바닷가 마을 속도로 마음속을 걷는 일
오랜만에 다시 가 본 독일마을에서는 가죽공방에 들어가 손바닥보다 작은 가죽지갑을 기념품으로 샀다. 하늘색 망토를 입은 작은 플라스틱 인형이 달려 있어 손에 쥘 때마다 행복감이 든다.
남해 지족의 소품숍 겸 카페 ‘기록의 밭’.
계단식 논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남해 다랭이마을.
남해의 석양.
특별한 것을 계획하지 않았던 남해 여행에서 얻은 건 ‘조금은 틈을 갖고 살아도 괜찮겠다’는 확인이었다. 삶은 의외로 단순하면서도 풍요로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시의 속도에서 잠시 빠져나와 바닷가 마을 속도로 마음속을 걷는 일. 그것이 지금 필요한 삶의 점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글·사진 남해=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