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 지도부, 윤 체포영장 집행에 방패막이 논리로 ‘국격’ 앞세워 尹 불법계엄에 만신창이 된 국격 이중으로 먹칠하는 일 그만둬야
천광암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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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지도부와 여권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을 반대하는 명분으로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 ‘국격’을 내세우고 있다.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10일 “관저에서 수갑 채워 끌고 가는 것은 국격을 엄청나게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같은 날 박종준 전 대통령경호처장도 “국격에 맞는 적정한 수사”를 언급했다. 앞서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국격을 거론하며 공수처의 체포영장 신청을 비판한 바 있다.
‘법원에서 발부된 체포영장을 집행하는 것이 국격을 훼손하는 일인지’ 묻기에 앞서 윤 대통령이 선포한 12·3 불법 계엄은 과연 우리 국격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부터 다시 한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군사독재, 내란, 쿠데타, 정정 불안, 치안 부재, 절대빈곤…. 계엄이 연상시키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계엄’은 서구 선진국에선 사어(死語)가 된 지 이미 반세기가 넘었고, 동남아나 중남미에서도 이젠 그닥 흔한 일이 아니다. 최근 10년 이내에 계엄을 선포한 적이 있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9개국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타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계엄을 선포한 나라와 한국을 빼면, 튀르키예(2016년) 필리핀(2017년) 미얀마(2021년) 에콰도르(2024년) 정도다. 민주주의 수준으로 보나, 경제 발전 성과로 보나 한국이 과연 이 나라들과 동렬(同列)에 설 나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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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 직후 미국의 포브스는 “투자자들이 현대 아시아의 계엄령 집행자를 생각할 때 인도네시아 미얀마 필리핀 태국 그리고 이제는 한국을 떠올리게 됐다”고 했는데, 이게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아니, 어쩌면 인도네시아와 태국은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우리를 거기에 넣느냐’고 억울해 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국격을 이렇게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고도, 윤 대통령은 계엄 후 한 달이 넘게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다. 무장한 정예부대를 시켜 국회와 선관위 등 헌법기관을 유린하려 해놓고도 “경고성 계엄”이라는 억지를 부렸고, 이마저도 부족했던지 이제는 변호사들을 앞세워 “평화적 계엄”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늘어놓고 있다. 이런 식이면 “계엄령 포고문에 적시된 ‘처단’은 ‘평화적 처단’을 의미한다”는 궤변이 등장할 일도 머지않은 것 같다.
윤 대통령의 국격 훼손은 12·3 계엄 그 자체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달 3일 공수처와 경찰이 체포영장을 집행하기 위해 대통령 관저에 진입했다가 경호처와 대치하는 장면은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공권력과 공권력이 서로 충돌하는 모습에서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은 정정(政情) 불안 국가’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 BBC는 ‘관저 공방전’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면서 “합법적 체포영장을 집행하려는 시도를 병력이 막고 있는 데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했는데 ‘한국은 기본적인 법치(法治)조차 이뤄지지 않는 나라’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국제적으로 각인되지 않았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권 위원장 등의 주장처럼 ‘내란 우두머리’ 혐의가 있는 대통령이라도 ‘수갑을 채워 관저에서 끌어내는 것’은 국격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치자. 애당초 무모한 불법 계엄을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체포를 놓고 논란이 벌어질 일도 없었겠지만, 이 또한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치자. 윤 대통령은 지금까지 공수처가 3번, 검찰 특수본이 2번 등 총 5차례나 자진 출석해서 진술할 기회를 줬지만 모두 거부했다. 이 중 한 번이라도 응했다면 ‘체포영장’이 등장할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윤 대통령이 ‘품격’을 잃지 않고 관저에서 걸어 나올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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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