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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잊어라…일은 남녀를 따지지 않는다”

입력 | 2024-02-26 14:45:00


이진숙 충남대 총장은 거점국립대 최초의 여성 총장이다. 충남대를 졸업한 이 총장은 “충남대가 지역에서 사랑받고 지역 인재를 키우기 위해 총장이 됐다”고 했다. 이 총장은 4년 간의 임기를 마치고 다음달 평교수로 돌아간다. 충남대 제공

“스탠퍼드 대학교 총장을 16년 역임했던 존 헤네시의 저서를 두 번 읽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총장직을 수행했느냐는 물음에 이진숙 총장이 이같이 대답했다. 존 헤네시 총장은 2000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총장에 오른 뒤 끊임없는 혁신을 주도해 오늘날 실리콘 벨리를 만드는 토양을 일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책, ‘어른은 어떻게 성장하는가’를 두 번이나 읽은 것은 “충남대를 혁신시키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국의 10개 거점국립대에서 여성 총장은 그가 처음이다. 국내 거점국립대에서 여교수의 비율은 20% 내외에 불과하다. 그만큼 여교수가 총장직에 오르는 일을 상상하기 쉽지 않다. 그가 총장에 선출된 것이 ‘사건’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그 과정도 이례적이다. 신임 총장이 취임하면 곧바로 차기 총장 선거전이 물밑으로 진행되는 게 국립대의 현실이다. 하지만 그는 3개월간의 선거운동으로 총장에 당선됐다. 2019년 치러진 선거에서 2차 투표에 과반을 얻어 당선된 것. 거점국립대 총장 선거는 3차까지 진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사이에 후보자 간 합종연횡이 이뤄지는 게 일반적이다. 2차 투표에서 당선됐다는 건 그만큼 구성원의 폭넓은 지지가 있었다는 얘기다.

이 총장은 자신을 “한 번 계획을 세우면 어떤 일이 있어도 밀고 나가는 성격”이라고 설명했다. “목표가 세워지면 온 힘을 다해 뛴다”는 것이다. 27일 임기를 마치고 평교수로 돌아가는 이 총장을 23일 충남대 총장실에서 만났다.



○ 총장은 고생하는 자리이다
-소감이 어떤가?

“여한이 없다. 오늘 마지막으로 거점국립대 총장협의회에 참석했는데 총장님들이 고생 많았다고 위로해 주셨다.”

이 총장 말대로 거점국립대 총장은 ‘고생’하는 자리다. 거점국립대 총장이 되기 위해 재수, 삼수, 사수까지 감수하며 선출된 뒤 접하게 되는 첩첩이 쌓인 현안은 “내가 왜 총장을 했지”란 말이 저절로 나오게 만든다고 총장들은 말한다.

국립대 총장들은 뛰지 않으면 안 된다. 가만히 있으면 재정이라는 ‘떡’이 그냥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총장도 다른 총장들과 마찬가지로 재정을 따내고 규제 완화를 위해 정부, 국회를 “문턱이 닳도록” 다녀야만 했다.

-고생하는 자리인데 왜 총장이 되고 싶었나?

“모교인 충남대를 지역에서 사랑받는 대학으로 만들고, 지역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이 총장은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 간 4년을 빼고는 평생을 대전에서 살면서 충남대 건축학과에서 공부했다.

그의 바람대로 충남대의 역량 강화는 교수 승진에 강화된 연구실적을 반영하는 것과 초광역 캠퍼스 구축으로 구체화됐다. 우수 인재 육성은 총장 취임 직후 우수 신입생에게 박사과정까지 학업과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최고 2억여 원을 지원하는‘CNU Honor Scholarship’이라는 장학제도 신설로 결실을 맺었다.

-손에 꼽는 성과는 무엇인가?

“크게 3개 부문이 있다. 첫째, 전국 거점국립대 최초로 초광역 캠퍼스의 토대를 놓았다. 대전의 대덕 캠퍼스와 보운 캠퍼스에 더해 세종 공동 캠퍼스, 신동 캠퍼스, 내포 캠퍼스까지 대전-세종-충남을 아우르는 캠퍼스의 확장을 이뤘다. 둘째, ‘글로벌 오픈 캠퍼스’의 길을 열었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유수의 대학들과 협력을 맺어 국경을 초월한 고등교육 혁신 방법을 제시했다. 셋째, 4년간 1조 2000억 원이 넘는 정부 재정지원을 받아 대학 장기 발전의 초석을 확보했다. 충남대는 앞으로 3~4년 뒤부터 달라진 인프라를 통해 새로운 연구·개발 성과를 낼 것이다.”



○ 나노 반도체, 의약·바이오 분야에서 ‘지방 서울대’가 되야 한다

2027년 문을 열 예정인 충님대 내포 캠퍼스 조감도. 충남대는 내포 캠퍼스를 수의, 농업, 해양, 친환경 모빌리티 분야 특성화 캠퍼스로 조성할 방침이다. 이진숙 충남대 총장은 ‘대학이 위치한 행정구역에서 벗어나 투자할 수 없다’라는 국립학교 설치령에 막혀 내포 캠퍼스 신설이 어렵게 되자 각계를 찾아다니며 ‘학교의 소재지 이외 지역에도 교육기본시설 등을 둘 수 있다’는 조항이 신설되도록 노력했다. 충남대 제공

충남대의 ‘지방 서울대’ 되기는 서울대 10개 만들기에서 나왔다.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지방에 있는 9개 거점국립대가 추구하는 대학 발전 방향이다. 이 안에는 거점국립대가 연구중심대학으로 전환하고 지역 성장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바람이 들어있다.

현재 독일이 제조업 분야에서 세계적인 강자로 올라설 수 있었던 데에는 전국에 흩어져있는 국가연구소와 TU9이라는 국립공대 연합의 시너지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충남대는 국내 최고 수준의 정부 출연 연구기관(정출연) 16개가 밀집한 대덕연구단지와 붙어있고 KAIST와 길 하나 사이를 두고 있어 여느 거점국립대보다 ‘서울대’ 되기에 좋은 환경을 갖고 있다.


-충남대는 어떤 ‘지방 서울대’가 되고 싶은가?

“나노 반도체와 의약·바이오 분야의 ‘서울대’가 되는 것이다. 두 분야는 대전·세종·충남의 중점 사업 분야이자, 충남대가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충남대는 지난해 권역별 반도체 공동연구 사업 충청지역 거점대학으로 선정됐다. 올해 신설한 반도체 융합학과를 포함해 2026년부터 매년 반도체 전문인력 1500명을 배출한다. 나노 반도체는 국방산업과도 연관이 깊은 만큼 인근의 국방과학연구소(ADD)와 협업해 초격차 연구를 수행할 플랫폼으로 자리잡는 게 목표다. 의약·바이오와 관련해서는 충남대와 기초과학연구원(IBS), 충남대병원 등과 공동으로 글로벌 바이오메디컬 클러스터 구축 작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인 산동지구에 있는 중이온가속기와 연계한 바이오메디컬 융합학과도 신설한다. 충남대는 대전 충남대병원과 세종충남대병원 등 충청권 전역을 아우르는 의학 벨트를 이미 보유하고 있는 만큼 기초와 임상이 모두 가능하고, 시너지도 거둘 수 있다.”

충남대의 연구중심대학 전환과 ‘지방 서울대’ 변신은 인근지역에 위치한 16개 정출연과 KAIST와의 협업이 원활히 이뤄졌다면 벌써 이뤄졌을 수도 있다. 이 총장이 취임 직후 지역협력본부와 연구 산학부총장을 신설하고 16개 정출연과 거리 좁히기에 나선 것도 “미흡한 성과를 반전시키보려는” 의도이다. 실제로 이 총장은 16개 정출연의 최고급 연구진 1000명이 참여하는 충남대 교육 및 연구 참여, 대전시 전략산업 분야 발전을 위한 개방형 연구복합체라는 시스템을 구축하기도 했다.



○ 한밭대와의 통합은 반드시 이뤄내야

이진숙 충남대 총장이 퇴임을 한 달도 남겨두지 않은 지난 1월 31일 한밭대 총장과 통합 추진에 서명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 총장의 한밭대와의 통합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이다. 충남대 제공

충남대가 지난해 글로컬대학30에서 탈락한 일은 대학가에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글로컬대학30에 대한 공고가 나기 전부터 한밭대와의 통합과 대학 혁신을 추진했던 이 총장에게도 뼈아픈 성적표였다.

이 총장은 글로컬대학30 탈락의 결정적인 원인이 한밭대와의 통합 무산에 있다고 본다. 4년을 탱크처럼 달려온 그가 “임기가 딱 1년만 더 있었더라면”이라고 아쉬움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22년 1월부터 시작한 한밭대의 통합은 충남대 교수, 학생들의 반대에 부딪혀 아직까지도 난항을 겪고 있다. 입학성적에 차이가 있는 대학간 통합은 학생들이 심하게 반대하기 일쑤다.

글로컬대학30에 선정된 충북대와 한국교통대의 통합 과정에서도 충북대 학생들은 합격생들의 성적을 뜻하는 ‘입시 결과(입결)’ 차이를 이유로 극심한 반대를 한 바 있다. 역시 글로컬대학30에 탈락한 경북대도 지난해 말 금오공대와 통합을 추진했으나 학생들의 반대를 넘지 못하고 통합을 포기했다.

충남대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라면 임기 만료를 코앞에 둔 총장이 통합 의지를 불태우고 행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달 이 총장은 한밭대와의 통합을 다시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통합 각서도 체결했다. 학령인구급감에 대처하고 더 좋은 대학, 지역에 사랑받는 대학이 되기 위해서는 “통합은 필수”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통합 전망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 총장의 의지가 새로운 총장과 교수, 학생들에게 얼마나 어떻게 전해져 통합에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 여자를 잊고, 유리천장은 생각지 마라
이 총장은 다음 달 건축공학과 평교수로 돌아간다. 교수로 돌아간 뒤 하는 첫 강의는 5일 오전 9시에 잡혀있다. 강의와 연구에 열중하다 1년 반을 보낸 뒤 정년을 맞을 생각이다. 총장에서 물러난 후 안식년을 보내고 정년을 맞는 일반적인 코스와는 다른 행보다. 이 총장의 경험은 훗날 다시 나올지 모르는 거점국립대 여성 총장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는 “여자를 잊어라”고 당부했다. “일은 남녀를 따지지 않는다. 여자가 올라갈 수 있는 유리천장을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야 일에 집중할 수 있다.”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